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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일제시기 징용과 종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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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일제시기 징용과 종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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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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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전화벨이 울리고 50, 60년전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이 군위안부였음을 신고해왔다. 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를 시작으로 92~93년 잇달은 피해자들의 신고 전화는 실로 오랜 어둠을 깨고 빛의 세계로 나왔을 때의 고고지성(呱呱之聲)보다 더 고귀한 거듭남의 소리였다. 그것은 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국제 세미나에서 윤정옥(尹貞玉)교수의 「정신대 답사보고」를 시작으로 한국정신대연구소(이하 연구소)와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의 군위안부문제 진상구명(究明)과 일본의 사과 및 배상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이 시작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그러면 일본군위안부, 군위안소가 대체 무엇인지, 그 역사적 실체와 성격을 살펴보자. 우선 「일본군위안부」를 가리키는 말로 「정신대(挺身隊)」가 있다. 정신대라는 말은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 이후 계속되는 제국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동원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누구나 일본제국에 「몸 바쳐 일하는 대원」이란 뜻의 제도적 용어다.

일제는 1937년 말 중국침략 이후 국민총동원령을 공포,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지 한국인 남녀 모두에게 정신대를 강요했다. 특히 한국여성에게는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이전부터 자행돼온 여성들의 강제동원을 합법화했다. 어쨌든 여자정신근로대란 여학교나 마을 등을 중심으로 일단 「지원자」라는 미명 아래 일정한 출정식을 갖고 일본으로 끌려간 여성집단을 일컫는다.

정신대와 함께 「처녀 공출」이라는 말도 널리 쓰였다. 그 이면에는 여성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집을 떠나 밖으로 나가면 「여성은 망가진다」는 잘못된 가부장적 여성관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근로정신대로 간 여성 중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또는 공장 안에서 강간을 당한 후 군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있었다. 또 강제징용된 노동자 합숙소 근처에는 별도의 산업위안부도 존재했다. 이들은 모두 성적 노동을 강요당한 넓은 의미의 정신대였다.

한편 종군위안부는 일본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용어다. 이 말은 종군 기자, 작가, 목사, 간호부 등 군대를 따라 함께 생활하는 민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원한 사람들로 적어도 자신이 왜 군대와 함께 하는지, 그 이유를 안다. 그러면 당시 한국인 군위안부 여성들도 자신들의 종군 이유를 알았을까? 물론 일본 유곽출신 여성중엔 종군위안부가 있었을 터이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살기 힘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곳에 자발적으로 또는 부모가 딸을 그렇게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종군위안부라는 말이야말로 청산돼야 할 식민지 잔재이며, 문제의 본질을 크게 왜곡, 은폐시키는 용어다. 더구나 일본우익은 천황의 군대를 위안한 것은 전쟁시기 당연한 여성국민의 도리이며, 돈까지 번 일에 무슨 사죄며 보상이 필요한가 하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강변한다. 이에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천황제 가족국가주의에서 성적유린을 해도 좋을 여성과, 결코 강간해서는 안될 여성으로 여성을 분리, 차별화하는 가부장적 여성관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군위안부라는 용어도 일본군을 중심에 놓고 여성을 대상화한 것으로 문제가 있다. 다행히 최근 유엔 인권소위에서 전시하 세계 여성의 보편적인 인권침해문제로 규정되면서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라는 적절한 용어가 새롭게 탄생됐다.

일본군위안소는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처음 실시된다. 그보다 앞서 1918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때도 위안부 여성은 많았다. 그러나 일본황군을 위한 하사품으로 군위안부를 만든 직접적인 동기와 목적은 남경대학살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1938년 중국에서의 일본군위안소는 점령지 일반 여성에 대한 강간 방지와 치안유지, 군의 사기 진작과 성병 방지, 기밀보호와 재정 충당 등 다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이후 1945년까지 동남아 전역에 걸쳐 일본군위안소는 확대 설치됐고 결국 군위안부제(制)는 일본정부의 최대한 묵인 또는 협조하에 육해군 부대가 적극 설치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됐다. 이는 먼 곳의 장기전에 동원돼 별다른 오락위안시설이 없는 일본군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방안이었다. 부대의 현지 사정에 따라 군대내에 설치, 직접 운영한 군직영위안소, 근처에서 민간인을 고용하거나 민간업소를 군이 관리 통제하는 군전용위안소 등으로 구분됐다. 다만 세계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해 후자가 성행하기도 했다. 어쨌든 군인 이용에 최우선의 편의가 제공됐으며, 병참과(課) 위안계(係)에서 적극 개입해 군위안소는 중요 병참시설의 하나였다. 그리고 순결한 식민지 한국인 미혼여성들이 가장 확실한 표적이었다.

위안부 생활은 대개 하루 10여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하는 일뿐만 아니라 정기검진, 질병과 임신, 물리적 폭력 등으로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 공포 그 자체였다. 도망은 커녕 낯선 곳에서 빚갚기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징역살이였으며, 이후에도 각종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은 있을 수 없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이제 한국의 민족과 여성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여성계의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문제의 해결을 위한 힘겨운 투쟁이 시작된 지도 어언 10년이 됐다. 그동안 정대협, 연구소, 나눔의 집과 여러 관련단체는 수요시위와 모금, 국제적 연대활동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적 진실 구명 작업, 민간 교육등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이들 여성의 짓밟힌 인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한국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 지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생존 할머니들의 심신과 영혼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일은 물론, 앞으로 충분히 있을 법한 여성인권의 문제, 그리고 식민지 체제하의 민족과 여성 문제에 대한 올곧은 역사인식이 요구된다. 동시에 2000년말 도쿄(東京)에서 열릴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을 더 열심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신영숙(申榮淑)한국정신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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