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의 조명은 언제나 화려하다. 쇼가 끝날 때까지 현란한 색상의 불꽃놀이가 이어진다. 그러나 오프닝을 앞둔 순간, 객석과 무대는 온통 적막일 뿐이다. 그 순간, 패션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천정에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은 그래서 더 없이 밝고 강렬하다.패션쇼 조명 연출가 최만준(58)씨는 그 빛을 생명의 탄생처럼 소중히 여긴다. 어둠속에서 빛을 밝히는 그 순간을 위해 40여년을 한결같이 무대뒤에서 숨죽여 살아왔다.
최씨는 모든 쇼란 음악과 연출 그리고 조명이 삼위일체가 돼야 비로소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조명이 최고라는 생각은 없다. 옷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만족해야지, 욕심을 부리다보면 주인공인 옷마저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최씨는 「조명의 마술사」에 어울리지 않게 겉모습이 동네 아저씨처럼 수수하다. 인생역정도 가난에 찌들었던 50∼60년대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소년시절의 호기심이 발단이 됐다.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형에게 도시락을 가져다 주면서 무대를 압도하는 조명등에 넋이 나갔죠』
까까머리 중학생은 그 때부터 영사기와 조명, 무대설치 등 극장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잔심부름을 했다. 그리고 스무살때인 61년 5.16 군사쿠데타 직전에 조명을 자신의 삶으로 택했다.
생활은 고달펐다. 조명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끼와 열정이 어우러지면서 서서히 그는 빛나기 시작했다. 70년대 당시 미8군 쇼에 초청됐고, 각종 패션쇼 제의도 쇄도했다.
90년부터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 손을 맞추며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차분한 보라색과 블루 계통을 좋아하는 김씨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최씨는 국내 최초의 조명발표회를 갖는 게 소원이다. 빛과 그림자로 엮어내는 「예술로서의 조명」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은 24일부터 덕수궁 중화전에서 열리는 「서울 밀레니엄 컬렉션, 새 천년 멋 이야기」라는 주제의 국제 패션쇼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야외에서, 그것도 밤과 낮을 번갈아가며 벌어지는 이 쇼는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그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행사다.
조명에 관한 한 국내 최고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외국의 첨단장비와 기술을 따라잡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며 딴소리를 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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