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7,8년 전쯤 되었을까.김영준 시인네랑 미천골로 하룻밤 쉬러 간 적이 있었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영인 구룡령 가는 길 따라 서림 황이를 지나 기록도 없이 사라진 선림원 터를 지나면 거기 미천골 휴양림이 있었다. 미천골 하늘은 정말이지 멍석 한 닢 깔이만한 면적밖에 안되었는데 우리는 그곳에 텐트를 치고 가족과 분리된 다음 삼겹살을 구워놓고 별빛 아래 소주를 마셨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음날 새벽이었다.
한여름이었지만 산 속의 새벽은 추웠다.
왈칵 한기가 엄습했고 과음 다음날이 늘 그렇듯 막연한 슬픔과 뉘우침 같은 것이 골짜기 물소리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지천인 물푸레나무 숲을 무기력하게 걷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내 목덜미에 떨어졌다.
얼마나 차고 섬뜩했던지, 나는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듯 정신이 번쩍 들었고 문득 이 신성한 숲속의 새벽을 맞기 위하여 오랫동안 미물처럼 잠들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둣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나무숲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로 나는 깨끗한 새벽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내가 벌레나 다름없다라는 물방울 같은 작은 깨달음이 기쁨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남설악은 깊고 푸른 곳이다.
그 깨끗한 별빛과 물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도의선사의 진전사지와 선림원 터가 이 말많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은 우리더러 너희는 아주 작은 존재이니 너무 나대지 말라고 이르지만 우리는 늘 그것을 잊고 산다.
「언젠가/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이 산 밖에/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벌레처럼 잠들었/다가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걸 다시 듣고 싶다」
/시인·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로 제1회 백석(白石)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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