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양말이 벗고 싶어진다. 자전과 공전의 뒤끝에 어김없이 빛은 마약처럼 도시에 살포되고 사방에서 물빛은 요란하게 튀어오른다. 우리 반도도 빛은 피해지지 않아 먼 남녘으로부터 등고선을 따라 화적떼에 차차 점령되고 만다. 요잇! 가만 있을 수 없다. 뒤꿈치에 박힌 굳은살을 손톱으로 뜯어내다 제풀에 행장을 꾸려 행산, 그놈의 화적을 맞으러 간다. 이런 땐 홧홧하게 얼크러진 마음 뿐 누구나 이름이 없는 자이다.다 연소되지 않은 기름 냄새를 풍기며 버스는 남부터미널을 출발해 저녁참에 하동 쌍계사 입구에 생이 시금털털한 사내 하나를 부려놓는다. 구례 지나오다 밤하늘 지붕 옆으로 길을 끌고 가는 산수유 무리를 목격했다. 밤이 오면 꽃들은 지리산 깊은 산곡으로 슬금슬금 숨어든다. 바랑을 지고 가는 옛적 그 앳된 비구니처럼. 아닌게아니라 마른가지에 뿌옇게 튀어오르는 산수유를 보고 있자면 비구니 애처로운 머리통에 비죽비죽 돋는 머리칼 끝들이 생각난다. 십 년 전 그네가 사라진 곳은 구례 산동 상위마을 어디쯤이다. 곧 3월이면 지붕이 노랗게 덮이는 산수유 마을. 거기 온천이 있어서인가. 그때면 매화도 길 옆에 마구 엎질러져 함께 피고 술먹고 취한 아낙네들이 밤새 귀신처럼 중얼거리며 마을을 떠돈다.
쌍계사에 짐만 홱 던져놓고 한 달이나 남해금산 보리암, 화엄사, 세석평전 등지를 헤매고 다녔다. 산수유에 노랗게 물든 옷을 입고, 홍매화를 눈 끝에 달고, 바야흐로 가지에 점점이 맺히는 왕벚꽃 씨알을 보며, 밤이면 개불에 전어 구이에 늦도록 소주를 마시며.
그러다 띄엄띄엄 「3월의 전설」(현대문학 98년 5월호)을 썼고 그것이 다 끝나던 날 벚꽃이 흐벅지게 핀 길가 마루에 앉아 또 탁한 동동주를 받아 마셨다. 산 위에서 내려오는 저녁 예불소리를 들으며.
나그네는 꽃지는 밤에 다니는 법인가. 그때 비구니 영영 못찾고 머리에 벚꽃을 맞으며 그곳을 떠나오던 날은 섬진강으로 은어떼가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밤엔 늦도록 져가는 꽃들의 읍소가 귀에 첩첩하였다. 작년 이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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