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신의 총아였다. 그의 얼굴은 위대한 문학작품을 남긴 대문호에 그치지 않는다. 미술, 음악, 연극, 철학,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르네상스 이후 최후의 전인적 인간형, 위대한 교양인·예술인의 모델로 남아있다. 영원한 이상을 좇아 끝없이 헤매는 파우스트처럼, 그의 생애는 진실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탐색이었다.괴테는 한때 화가를 꿈꿨다. 2,700여점의 그림을 남겼으며 「색채론」을 썼다. 37세부터 2년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대 그리스·로마미술의 위대한 유산을 흡수하고 돌아와 미술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자연과학자 괴테는 해부학, 식물학, 광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글을 쓰는 것보다 여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을 만큼 그것은 취미 이상이었다.
그는 또 42세부터 26년간 바이마르 궁정극장을 이끈 극장감독이었다. 여기서 연극을 기획·연출·개작했으며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280번이나 공연했다. 음악은 괴테의 짝사랑이었다. 첼터, 라이하르트, 카이저 등 당대 작곡가들과 교류하고 집에서 자주 음악회를 열었다. 그러나 천재의 재능으로도 음악은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첼터에세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음악을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쓰면서 『나는 저 큰 즐거움을 개념과 언어로 바꿔놓는다네. 때문에 내 인생의 3분의 1이 내게 결핍돼있다는 것도 잘 알고있다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시가 아름다운 음악적 울림을 갖도록 노력했다. 덕분에 딱딱하고 거칠던 독일어는 문학적 언어로 다듬어졌고 슈베르트 등 많은 작곡가들은 괴테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독일가곡의 영광을 꽃피웠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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