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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원산총파업, 노동운동의 '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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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원산총파업, 노동운동의 '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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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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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원산총파업은 그 규모와 지속성, 그리고 강인성과 투쟁성이란 점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문에 원산총파업은 당시는 물론이고 광복 이후에도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됐다. 원산총파업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강조점과 해석의 시각에서 상당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냉전체제하에서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라는 측면에 주목해 왔다고 한다면 8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은 사회계급과 제국주의 지배라는 시각을 통해 이를 보고있다. 또 북한에서는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적, 혁명적 진출의 선구」로서 총파업을 파악하면서 그것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으로 연결시켜 왔다. 일본에서의 연구 또한 이와는 구분되는 미묘한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현재의 관점과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것이라면,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원산총파업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의 상호관련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원산총파업에서 지역적 역동성과 활력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동아시아에서 상호이해와 교류증대를 위한 연계라는 차원에서, 대동아 공영권으로 수렴되는 아시아에 대한 일제의 강화되는 침략공세에 맞선 대안적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최근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전통과 근대의 상호작용, 나아가선 한국에서 근대성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원산총파업이 갖는 의의를 논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이나 인천, 원산 등지와 같은 개항장에서 초기 부두노동자의 조직은 의형제 또는 만동생(萬同生)등 자연발생적이며 전통적 형태를 띤 것에서부터 점차 근대적 형태의 노계(勞契), 또는 노동조합으로 발전돼왔다. 원산총파업은 원산항에서 하물의 하역·운반에 종사하는 부두노동자를 주축으로 조직된 원산노동연합회에 의해 지도되었는데, 1921년 설립된 원산노동회를 원산노동연합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노동회의 기본단위로서 1910년 무렵에 조직되었다고 하는 「도중(都中)」이라든가, 또는 임금의 평등분배를 기반으로 적립금 마련을 위한 「공목(空木)」과 같은 제도들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제도들은 「봉건적 청부노동계약」이나 십장의 온정과 전횡이라는 부정적 현상들과 연관돼 있지만, 조합의 기금등 재정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기능했던 측면도 있다.

당시 원산노동연합회가 전국의 어느 노동조합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노동자 복지시설을 갖출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1922년 곡물부와 잡화부가 있는 소비조합을 설립, 노동자들에게 생활필수품을 20~40% 정도 싸게 공급했으며, 전용회관이나 식당 이발부를 갖추고 각 도중(都中·단위조직)에 구제부를 두어 조합원의 관혼상제나 노동재해 등에 공동 대처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 전국 노동단체로선 거의 유일하게 노동병원을 직영하기도 했다. 일상생활에서 노동자들의 복지와 이익에 대한 배려는 지역 내에서 유일한 노동단체로서 노동연합회의 정당성을 강화하였다. 총파업 당시 원산의 거의 모든 노동자를 망라한 2,200여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었다.

이러한 단결된 역량을 배경으로 노동연합회가 직접 개입하거나 지도하여 승리로 이끈 20여개의 파업을 비롯하여, 총파업 직전까지 이 지역 노동대중의 파업투쟁은 무려 360여건이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물론 단순히 전통적 요소들의 온존과 그것의 이용만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과는 구분되는 근대적 요소들과의 결합을 통해서 가능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1920년대를 풍미하였던 사회주의와 사회운동의 강력한 영향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전통적 십장제나 봉건적 노동관행에 대신하여 근대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조직과 운영에서 전통적인 이사제가 집행위원제로 바뀌었으며 다수결에 의거한 의사결정의 원칙이나 근대적 회의 방법이 도입되었다. 노동현장에서도 십장제 폐지, 최저임금제 및 퇴직금 제도의 도입, 성과급을 시간급으로 바꾸는 문제, 또는 8시간 노동제나 단체교섭권이나 단체계약권의 획득과 같은 근대적 쟁점들이 부각되었다. 1929년의 총파업도 사실은 이처럼 지역연맹체로서 노동연합회의 대표성과 단체계약권을 일제가 부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원산지역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 그리고 규율에 대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자율성을 증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9년 원산총파업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90여일이나 지속하면서 3.1운동,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일제하 대표적 민족해방운동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저변에는 이러한 전통과 근대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기제(機制)가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수탈과 빈곤으로 얼룩진 가혹한 식민체제 하에서도 일종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일상이 일시적이나마 가능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기 식민지적 근대성의 양상에 대한 대안적 사례를 접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서구적 근대의 일방적 횡행과 더불어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전통의 무조건적 옹호에 대한 세기말, 현재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김경일(金炅一·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사회학)

원산총파업 연구자료

김윤환·김낙중「한국노동운동사」(일조각·70) 김중열「한일노동투쟁사」(집현사·78) 김윤환「한국 노동운동사-일제하 편」(청사신서·82) 김경일「일제하 노동운동사」(창작과 비평사·92) 「1929년 원산총파업과 이후의 노동운동」(東村 朱宗桓화갑기념논문집·89) 「1929년 원산총파업에 대하여」(창작과 비평·89) 윤형빈「1929년 원산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그 교훈」 강동진「원산총파업에 대한 고찰」(지식산업사·77) 김광운「원산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역사문제연구소·89) 「원산총파업을 통해본 노동자조직의 건설문제」(한국역사연구회·89) 진우용「원산에서의 식민지수탈체제의 구축과 노동자계급의 성장」(한국역사연구회·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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