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끝난 줄 알았다.명쾌하고 직설적이며, 때론 절묘한 비유로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언어. 인간의 잠재욕구와 심층심리를 파고드는 주제와 소재그리고 구성. 그 드라마의 마술사도 감각과 느낌의 미학에 열광하는 영상세대 앞에서는 무력한 듯했다. 더 이상 그의 시대는 올 것 같지 않았다.
수다스런 입심에 질려버린 때문일까? 97년 케이블 TV(HBS)의 「사랑하니까」(연출 박철)는 그의 퇴락을 알리는 작별인사 같았다. 지난해 말 방송학자 평론가들이 30년 작품세계를 정리한 「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를 펴냈을 때도 그는 썩 좋아하지 않았다. 『이젠 한물갔으니 기록으로나 정리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그러나 김수현은 김수현이었다.
김수현의 드라마는 역시 마성(魔性)을 갖고 있는가? 「벌떡」일어난 김수현(57). 그의 드라마 「청춘의 덫」(SBS 수·목 오후 9시50분)이 안방을 사로잡고 있다. 방영시작 두 달이 가까워지면서 MBC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를 추월할 태세다. 시청률로 볼 때 거의 두 가구 중 한 가구가 보고 있다. 주연 심은하의 인기도 천정부지다.
21년 전인 78년 6월 시작했다 반윤리적이란 비판으로 5개월여 만에 하차한 이 드라마가 20년의 시공을 넘어 여전히 왜 인기인가? 단순한 한(恨)풀이라면 모를까. 시청자 김민지(38·서울 송파구 방이동)씨는 처음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방송이 일본 것을 베끼다 못해 자기복제까지 하다니. 또 그 지겨운 라디오식 수다를 들어야 하나. 「김수현 사단」이 다시 모이겠지.
그러나 이런 지레짐작을 김수현은 뒤집었다. 등장인물들은 차분하고 조용해졌다. 수다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빠른 템포를 선택했다. 유호정(영주 역)을 제외하면 그의 사단이랄 수 있는 연기자도 없다. 대신 그는 감정변화와 깊이가 무르익은 심은하를 선택했다. 99년판 「청춘의 덫」은 이렇게 옷을 갈아 입었다.
■김수현은 주저하지 않는다.
곧바로 동우(이종원)의 배신에서 시작해 놓고는 아이의 죽음까지 설정해 긴 시간 윤희(심은하)를 처절하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시청자들을 윤희의 복수에 동참하게 만든다. 윤희가 눈물을 거두고 돌아서며 동우에게 싸늘하게 내뱉은 『당신, 부숴 버릴꺼야』. 시청자들은 전율과 희열을 느낀다.
그때부터 김수현의 드라마는 부도덕이 아니다. 바로 원우현(고려대 신방과)교수가 말하는 「가족 간의 애정과 가정의 소중함」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을 위해 김수현은 치매노인(김정란), 자식 못 낳은 본처(김용림)와 첩(정영숙)까지 배치해 놓았다.
■시청자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바로 김수현의 영리한 대중심리 읽기다. 그는 그 시대 시청자들(주로 여성)의 욕망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들의 시청리듬을 탄다.
그리고는 한발 앞서 그것을 드러낸다. 홈드라마 「새엄마」(72년)는 재혼과 재취의 부끄러움을 씻어주고, 「사랑과 야망」(87년)은 여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사랑이 뭐길래」(91년)는 흔들리는 가부장의 위치를 외쳤다. 그것은 때로 저항 반항 전복으로 비쳐진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늘 극단적이지만 한편 그가 아직도 이 시대에 유효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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