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자식은 부모를 내팽개치는 가족해체의 시대. 흔들리는 가족관계는 우리 사회가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중심이 없이 방황하는 출발점이 되고 있다.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엔 따뜻한 가슴으로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다. 가족이란 일관된 주제로 집필활동을 해온 방송작가 허윤정씨가 발굴한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가족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 그 틈새로 화사한 봄햇살 같은 웃음 소리가 쏟아진다. 곧 이어 쓰르락 쓰르락 싸락비로 마당쓰는 소리, 마당 한 켠에서 펌프질 소리, 드르륵 부엌문 열리는 소리, 어푸어푸 세수소리가 차례로 들려 온다. 『이거 마지막 뜨거운 물이지?』 『아이고 어쩌나? 도련님은 오늘도 찬물에 세수하셔야겠네』
전남 영광(영광읍 단주리) 김영구(72)씨네 아침은 이처럼 부산하다. 손 귀한 집이라 힘닿는 대로 낳아보자 했던 것이 12남매가 되었다는 김씨.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제외한 4남 5녀를 비롯해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등 23명의 가족이 모두 한지붕 아래 살고 있다.
스물세명이 함께 나누는 밥상만 해도 열상, 아낙들은 매 끼니 잔치상을 차리는 기분이다.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 서로 큰 소리로 불러야 비로소 알아들을 지경이라는 이 집 식구가 지난 겨울 담궜던 김장만 배추 700포기. 일주일에 먹는 쌀은 기본이 한가마다.
화장실은 여섯칸, 창고에는 고구마며 무며 양파가 자루째. ㎏이나 근의 단위는 이 가족에게는 없는 단어다. 하루 벗어내는 옷만 100벌에 가까운지라 세탁기도 감당하기 힘들어 마당채에는 돌빨래판이 징검다리처럼 자리잡고 있다.
큰 오빠부터 시작된 옷을 막내까지 물려입는 경우는 기본이고, 심하면 손주까지 이어진다. 식구들이 유일하게 갖는 소망이 있다면 외식을 해 보는 것. 축구선수(다섯째 아들), 단오제를 3연패한 여자씨름장사(막내딸), 육상 국가대표 상비군(세째딸)을 필두로 우람하기만한 이들 스물 세식구가 외식을 나선다면, 한달 생활비가 거덜나기 십상이다.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좀 수그러드셨지만 말도 못했습니다. 밤이면 손전등을 들고 방방마다 점호를 돌았을 정도로 무서우셨어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가족인만큼 모이면 추억거리도 많다는 이 가족이 시부모며 사위, 며느리며 손자 손녀들까지 모두 함께 사는 이유는 단 한가지. 『가족은 모여 살아야 힘이 된다』는 것. 『큰 형님을 사고로 잃었습니다.
함께 살지 않았다면 조카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여 사니까 모두가 아버지고 어머니고 형이고 아우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잊고, 힘을 얻고, 더욱 의지가 되지 않았을까해요』
봄이 오는 길목,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삭막함 투성이다. 그 속에서 가만히 불러본다. 할아버지 할머니 형 누나 언니 숙모 삼촌…. 가족이 주는 정겨움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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