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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열며]개방형 임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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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열며]개방형 임용제

입력
1999.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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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純種)은 약하다. 종자를 여럿 섞은 혼혈(混血)의 시대가 오고 있다」어느 교수가 칠판 위에 분필로 「관(官)」자와 「학(學)」 및 「재(財)」자를 나란히 적고는 주위를 작은 원으로 둘러싼 다음에 한 말이다 국제화시대를 이끌 새로운 리더는 관계와 학계 및 재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지성(知性)과 야성(野性)을 다같이 키워온 혼혈아라는 진단이었다. 그리고 4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때 그 말은 여전히 생생하다. 다양한 「피」를 섞어 더 강한 종자를 개발해내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때문이다.

미국은 「혼혈」을 이끈다. 맨해튼 월가에서 최첨단 투자상품과 기술을 개발해 온 은행가 출신이 미국 재무부의 핵심직책을 차지하고 평생 국제무역과 군사적 안보를 연구하고 전략적인 사고의 틀을 다듬어온 학자 출신이 국무부 내에 대거 포진해 있다. 관과 재 및 학의 평범한 전통적 구분을 깨고 자리를 수시로 옮겨가면서 실무경험과 이론적 지식 및 정치적 감각을 다같이 가꾸어온 팔방미인이 관직에 앉아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혼혈아는 「절세는 하지만 탈세는 하지 않는다」는 윤리의식까지 갖추고 있다.

이러한 팔방미인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식사 초대마저 향응으로 처벌하는 추상같은 감사기관이 있고 반세기에 걸친 세제개혁을 통해 부패를 근원부터 차근차근 제거해온 투명한 경제사회가 있다. 게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인사를 서로 다투어 모셔가는 재계 및 학계가 존재하는 덕분에 전문인은 관직에 있는 동안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다.

그러한 미국 바로 밑에 있는 멕시코는 딴판이다. 그곳 역시 공무원 사회가 개방형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멕시코 공직자는 관직생활이 끝난 후에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늘 「사후(事後)」를 걱정하면서 「차기대권」을 차지할 만한 「주자」에게 줄을 대어 자리를 보존해 보려는 패거리 정치나 일삼는다. 그러다 여의치 않으면 「돈」을 챙겨 편안한 은퇴를 준비하려고 할 만큼 사회 전반의 윤리의식이 빈약하고 감사기관 및 사정당국이 부실하다.

개방형 공직사회로 전환할 태세인 한국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개방형 임명제는 미국적인 팔방미인을 대거 배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관계에 새로이 나설 전문인이 기존의 공무원보다 공(公)과 사(私)를 더 명확히 구분하고 「이해상충」에 빠질 상황을 스스로 먼저 피하려 할 만큼 윤리의식이 투철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권이 교체되면 사회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신분이기 때문에 관직 이후의 삶을 준비하려는 생존본능에다 전통적 연고의식에까지 이끌려 개혁의지를 잃고 행정을 「편의 봐주기」로 착각할 위험성이 적지 않다. 여기에다 차기대권이나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정쟁까지 벌어지는 날이면 개방형 공직사회는 자기 사람만을 심기 위한 낙하산 인사로 얼룩질 것이다.

게다가 혼자 관계에 들어간 지금까지의 「특채」공무원은 기존 행시출신 중심의 인맥에 선을 대거나 아니면 「이지메」를 당하는 양자택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방형 임명제의 경우는 다르다. 외부인사가 공직사회 내에 독자적 세력형성을 꿈꿀 수 있을 만큼 충원의 통로가 대폭 열린다. 그러한 이방인의 출현에 기존의 공직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자명하다. 사기가 꺾여 아예 일을 손에서 놓거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외부 전문인에 대한 고사작전에 나설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개혁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이 아니다. 아울러 공무원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자리를 뺏고 야단만 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차라리 공무원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관 내부에 개혁을 지원해줄 「팀」을 일부 공무원 중심으로 키우는 편이 더 낫다.

김병국

金炳國·고려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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