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원짜리 007가방과 세뱃돈 10만원」. 10만원권 지폐 발행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부작용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뇌물전달의 단골수단이었던 007가방에는 1만원권으로 대략 5,000만원이 들어간다. 자금추적이 불가능한 10만원권이 등장하면 이 가방은 5억원짜리로 바뀌고, 1억원 가량을 담을 수 있는 사과상자는 무려 10억원 짜리로 변할 수 있다. 또한 1만원권으로 해결하던 세뱃돈이나 팁도 10만원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10만원 자기앞수표가 현금처럼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25년이 넘게 「최고액면」자리를 장기집권하고 있는 1만원권은 하야(下野)해야 한다는 찬성론자들의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10만원권 지폐 발행 논란은 1만원권의 가치가 지나치게 낮다는 주장에서 출발한다. 고액권 발행에는 그 나라의 국민소득이나 물가수준, 현금 선호도 등이 영향을 미치지만 최고액면의 수준은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최고액권 100달러는 미국 1인당 국민소득(97년기준)의 186분의 1, 캐나다 1,000달러는 25분의 1 수준이다. 일본의 1만엔은 386분의 1로 비교적 낮은 편에 속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1만원권은 849분의 1로, 일본의 절반에도 못미친다.
물론 영국이 82년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종전 최고액권이었던 20파운드를 50파운드로 대체한 것 처럼 물가수준이 고액권 발행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위스는 무려 40년이상 최고액권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볼때 8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10만원권, 아니면 최소한 5만원권 지폐 발행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국회 재경위는 16일 오전 10시 국회 제3회의장에서 고액권 발행과 관련한 공청회를 개최한다. 공청회에는 학국은행과 전경련, 학계와 시민단체 관계자 10명이 나와 찬반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찬성론
10만원권 지폐 찬성론자들은 경제규모가 커진데다 현금처럼 쓰이는 10만원 자기앞수표 발행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펴는 곳은 정치권. 지난해 국정감사때 전철환(全哲煥)한국은행총재로부터 『(10만원권 발행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 낸 국민회의 박정훈(朴正勳)의원은 10만원권 자기앞수표 발행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이렇게 지적했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97년 한햇동안 장당 27원에 12억1,400만장이 발행돼 발행비용만 327억원, 수표 취급과 관련한 금융기관의 인건비가 장당 850원으로 모두 9억1,700만장이 교환돼 유통비용 7,800억원 등 발행과 유통에만 8,000억원 이상이 들었다』
한 두번 쓰고 폐기하는 자기앞수표를 평균 수명이 3년8개월인 지폐로 대체하면 연간 8,000억원이상을 절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1만원권이 발행된 73년에 비해 77.6배 커졌고, 소비자물가는 10.1배 높아져 1만원권의 가치가 너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밖에 고액권 발행이 인플레 기대심리를 부추긴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푼돈이 되지 않게 하려는 성향으로 소비를 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학자도 있다.
■반대론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인플레와 탈세에 악용될 가능성 등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이나 전자결제가 확대되는 추세를 거스르고 있다는 점도 거론된다. 국세청이나 한국은행, 사회단체 등이 이 편에 서 있다. 지난해 내수 진작차원에서 10만원권 발행을 검토했던 재정경제부도 반대론에 기운 상태다. 세무당국 관계자는 『공평과세를 위해 병원이나 법무법인 등에 신용카드 사용을 독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액권 발행은 탈세심리를 유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앞수표를 일일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해야 하는 금융기관 역시 수표관리의 불편을 들어 10만원권 발행에 적극 반대는 않고 있지만, 일각에선 현금수요를 억제하는 정책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현금으로 1,000만원이상을 예금하는 경우 금융결제원에 통보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
이와함께 고액권을 발행할 경우 자금이 금융기관으로 환류되지 않아 통화정책기능이 약화할 수 있고, 위조지폐가 급증해 이를 방지하기위한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반대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희경기자 hkjung @hk.co.kr
* 각국 최고액면권
세계 각국에서 발행되는 화폐중 최고액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단순히 액면크기만 따진다면 터키 중앙은행의 100만리라 지폐가 세계에서 가장 단위가 높은 「최고액면(最高額面)」 화폐이다. 그러나 구매력(액면가치)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에는 싱가포르의 1만달러(약 800만원)짜리 은행권이 가장 비싼 화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경제·사회발전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는 주요 선진국(G-10 국가)들은 「최고액면권(最高額面券)」을 어떤 기준에 따라 발행하며 유통시키고 있을까.
우선 선진국들이 발행하고 있는 최고액면권의 평균가치는 97년말 환율로 계산할 경우 우리 돈으로 약 44만원 정도.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1만원권에 비해 44배나 높은 수준이다. 국가별로는 스위스의 1,000프랑(약 74만원) 은행권이 액면가치가 가장 높으며 50만리라(약 40만원) 지폐를 발행하고 있는 이탈리아는 액면크기로서는 선진국중 1등이다.
주요 선진국의 최고액면 크기는 「50」에서 「50만」까지 1만배 차이가 난다. 영국(파운드)의 경우 가장 낮은 「50」을 최고액면 숫자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이탈리아는 「50만」이 최고액면 숫자다. 가장 많은 선진국이 최고액면으로 삼는 숫자는 「1,000」. 독일(마르크), 캐나다(달러), 네덜란드(길더), 스웨덴(크로나), 스위스(프랑) 등 5개국이 사용중이다. 다음으로는 일본(엔), 벨기에(프랑) 등이 「1만」을 최고액면 숫자로 채택하고 있으며 미국(달러)과 프랑스(프랑)는 각각 「100」과 「500」이 발행되는 화폐의 최고액면이다.
한 나라의 최고액면은 그 나라의 경제상황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500달러, 1,000달러, 5,000달러 및 1만달러짜리 고액권을 발행한 적도 있으나 이들 은행권이 실거래에서 사용되지 않고 퇴장, 69년부터는 발행이 중단됐다. 반면 영국과 벨기에는 화폐가치 하락에 따라 각각 82년과 92년에 50파운드(종전 20파운드)와 1만프랑(종전 5,000프랑)짜리 최고액면 지폐를 발행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1만원권의 약력
국내 지폐중 최고액인 1만원권이 처음 등장한 것은 73년이다. 당초 물가상승을 이유로 그 한해전 5,000원권과 함께 발행될 뻔 했으나 예상치 못한 도안시비로 늦춰졌다. 한국은행이 72년 1만원권 발행공고를 내면서 제시한 도안은 앞면이 국보 24호인 석굴암의 본존 석가여래좌상, 뒷면은 불국사 전경이었다. 그러자 기독계는 『특정종교를 두둔한다』, 불교계도 『신성한 부처님을 지폐에 담았다』고 각각 반발하고 나섰다. 불교신자였던 당시 영부인 육영수(陸英修)여사가 불교 포교를 위해 지폐에 부처상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 결국 1만원권은 세종대왕상과 경복궁 근정전으로 도안이 바뀐채 이듬해 발행됐다.
5,000원권이 발행되기 이전의 최고액면은 62년 화폐개혁을 통해 첫 선을 보인 500원권. 최고액면이 10년새 열배 높아진 것이다. 사실 53년의 화폐개혁까지 감안하면 62년의 500원은 50년의 50만원 수준이다. 또한 2차례의 화폐개혁이 없었다면 현재의 1만원권은 한국은행권이 처음 발행된 50년의 화폐단위로 1,000만원과 같은 셈이다.
이는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에 따른 큰 폭의 물가 상승을 반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최근 10만원권 지폐 발행제안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례로 1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73년 당시에는 1만원으로 쌀 한가마(80㎏중품기준·9,728원)를 사고도 남았으나 지금은 6㎏어치도 못살만큼 물가도 크게 올랐다. 경제규모는 국내총생산(GDP)기준으로 당시보다 77.6배나 커졌다. 1만원의 가치가 그 만큼 떨어졌다는 얘기다. 이를 반영하듯 국내 지폐발행 잔액중 최고액면(1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87.9%로 일본(83.4%) 미국(60.5%) 등보다 높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도 연간 7억~8억장 발행(교환기준)되고 있다. /정희경기자 hk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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