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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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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 오호근 기업구조조정위원장

입력
1999.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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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잃었을때 더 잃지 않으려면 과거를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염라대왕」이란 섬뜩한 별명을 가진 오호근(吳浩根·57)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 그의 「회생철학」은 자신의 삶에서 터득한 것이다. 지난 몇달동안 그의 손을 거쳐 문을 닫은 기업은 300여개.

어느 기업을 살리고 죽일 것인지를 채권은행들에게 제시하는 일이 그의 역할이다. 기업들이 과거 번창하던 때에 집착, 부실계열사를 털어내지 못하면 공멸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오위원장은 기업 생사판정에 거리낌이 없다. 그 자신이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80년대 국내 최대 종합금융사 사장으로 수천억원대 자금을 주무르며 금융인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다 91년 반신이 마비되는 뇌질환에 걸리고 급기야 92년엔 폐암선고까지 받았다.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빠지는 항암요법이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이겨냈다』고 말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오위원장의 기질은 고단했던 청년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자유당정권시절 민주당 거물정치인인 고(故) 오위영(吳緯泳)씨의 2남4녀중 막내아들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미스코리아출신으로 드라마센터(서울예대 전신)교수를 지낸 현주(賢珠·60)씨가 넷째누나이다.

경기고 재학때까지 「도련님」으로 자랐던 그는 5·16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군사정부가 정치권을 탄압하면서 집안이 기울자 62년 주머니속에 고작 200달러를 넣고 홀홀단신 유학길에 올랐다.

웨이터, 택시운전사, 태권도교관, 미국무성 계약직 등 닥치는대로 일하며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미국무성에서는 개도국정치인 등의 미국방문을 돕는 일을 했는데 당시 야당정치인이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두달동안 안내하기도 했다.

오위원장은 귀국후 고학생활로 몸에 밴 근성을 발휘했다.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종합금융업에 전격 투신, 주위로부터 『교수자리를 버리고 기업체 부장으로 가다니 정신이 있느냐』는 충고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승부근성으로 합작·외자유치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부상, 10년만에 사장에 올랐다. 고리원자력발전소1호기, 포철 증설, 서울지하철 3·4호선, 선박건조 등에 투입된 외자가 그의 「작품」이다.

그런 의욕은 투병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91년 뇌질환에서 회복되자 투병생활에 희망을 주었던 미국작가 하임 포톡의 한국전쟁 소재 소설 「한 줌의 흙」을 번역, 출판해내기도 했다.

그러다 1년만에 컴퓨터앞에서 피를 토한 뒤 병원으로 실려가 폐암선고를 받았다. 10년 세월을 병마에 빼앗겼던 그의 얼굴에서 회한을 엿보기란 힘들다. 오히려 50대 후반 같지 않은 열정과 단호함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한다.

그는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을 벼슬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금융계에서 익힌 경험이 어려운 경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유승호기자 sh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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