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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9) 조직적 농민항쟁 '암태도 소작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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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다시쓴다] (9) 조직적 농민항쟁 '암태도 소작쟁의'

입력
1999.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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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岩泰島)농민항쟁은 1920년대 조선농민운동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세계운동사에서 보듯이 어떤 운동이나 혁명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암태도 농민항쟁 역시 견고한 조직과 민족·계급 모순에 입각한 사상으로 무장, 전개된 투쟁이었다.역사적으로 볼 때 암태도 사람들은 견고한 공동체 의식으로 조선 봉건정부에 항쟁해왔다. 암태도의 토지가 300년 이상 내수사·궁방(宮房)의 장토로 지배받아오면서 끊임없이 거납(拒納)항쟁을 벌인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암태도 농민들에게 항쟁의식의 싹을 틔우고 토지에 대한 열정을 샘솟게 했다. 더욱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항쟁의식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1920년대 암태도 농민항쟁은 다른 지역의 사례에 비해 투쟁규모나 기간, 성과면에서 주목할만하다.

암태도에서 농민항쟁이 조직적으로 가시화한 것은 1920년부터. 1920년에 박복영(朴福永)씨를 회장으로 「암태면 청년회」가 조직되고, 1921년에는 박복영 손학진(孫學振) 서동오(徐東吾) 등이 중심이 돼 「여자강습원」을 개설해 여생도 40여명을 교육시켰다. 1922년에는 「암태사립 3·1학사」(학사장 박복영)를 설립, 여성 교육외에 보다 폭넓고 조직적인 교육을 많이 실시했다. 1923년 12월에 「암태소작회」가 창립된 이후 야학을 6개소(나중에는 12개소로 증가)나 설치해 남녀노소 구별없이 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학생수가 3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교육열은 대단했다. 교육내용은 문맹퇴치를 위한 기초적인 교양을 위시해 계급과 민족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내용이었다. 섬 지역에서 농민운동이 보다 조직적이며 격렬했던 까닭은 바로 야학을 통해 힘입은 사상적 무장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외에도 연극을 통해 계몽과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12월 암태청년회의 주최로 민중극단을 조직해 「눈물의 꽃」이라는 공연을 했다. 이때 관객은 700여명으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후 민중극단은 인근 각 섬을 순회하면서 연대의식을 북돋웠다.

이처럼 적극적인 교육과 항쟁의식의 고취로 농민운동이 조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상태에서 1923년 7월 암태 농민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서태석(徐邰晳)이 귀향했다. 서태석은 암태 소작인회를 조직, 보다 실질적으로 농민항쟁을 이끌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투사였다. 1920년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일 서태석은 목포에서 열렬히 독립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돼 1년여의 옥고를 치뤘다.

암태소작회는 지주들의 무리한 소작료(7~8할)징수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소작료를 논 4할, 밭 3할로 내리지 않을 때에는 불납동맹으로 대응키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를 통보받은 암태도의 대지주 문재철(文在喆) 천후빈(千後彬)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소작회는 문지주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했다. 그런데 오히려 문지주의 문중 사람들이 테러단을 조직, 문지주와 교섭하러 가던 서태석 박종남 서동오 등을 집단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격앙한 농민들은 문지주의 집으로 몰려가 위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문지주의 송덕비를 파괴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목포경찰서는 무장경관 30여명을 암태도로 급파해 서태석외 소작회 간부 12명을 구금했다. 소작회는 이들의 석방을 도지사·총독에게 진정·호소했으나 지주 편에 서 있는 그들이 들어줄 리 만무했다. 지주측은 전년도 소작료 징수를 위해 테러단을 조직하고 강제로 소작료를 징수했다.

직접적인 대지주 투쟁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안 암태도 소작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목포형무소에 구금된 간부 12명을 석방하기 위해 청년회대표 박복영, 소작회대표 김용학(金龍學), 부인회대표 고백화(高白花)를 주축으로 주민들이 직접 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 시위하기로 했다. 6월 4일 암태도 농민 600여명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을 에워싸고 석방시위를 했다. 이에놀란 당국은 소작회 간부 13명을 석방하기로 약속했고 농민들은 일단 귀향했다.

그러나 소작회 간부들은 석방되지 못했다. 농민들은 다시 격분해 아사(餓死)동맹을 결의하고 7월 8일 다시 목포로 나가 시위했다. 600여명의 농민들은 목포재판소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12일까지 단식투쟁을 했다. 12일에는 비까지 내려 농민들은 눈물과 빗물이 한데 엉킨 젖은 땅위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본 목포유지들은 자리를 옮길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며칠간의 단식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늘어나자 농민들은 면화창고로 자리를 옮겼다.

13일 대표들은 문지주와 다시 담판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농민들은 목포시내를 시위한 후 문지주의 집으로 몰려갔다. 출동한 경찰들은 이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농민 26명을 경찰서로 압송했다. 14일 농민들은 간부 13명과 전날 구속된 26명의 석방약속을 받아내고 암태도로 돌아갔다. 다음날 26명은 석방됐으나 간부 13명은 오히려 광주로 후송됐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암태도에서는 다시 300여명의 결사대가 조직됐다. 우선 박복영을 뽑아 광주지방법원장에게 협상 대표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이 정보를 접한 목포경찰서장은 직접 암태도로 와서 지주와 조정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이는 암태도농민항쟁에 대한 사회여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무마책이었다. 당시 신문에 암태도 투쟁기사가 상세히 보도돼 곳곳에서 동정과 지원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당국의 태도가 바뀌자 지주들은 결국 소작회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암태도 농민항쟁은 일제 지주층의 보호·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암태도의 농민들이 시위할 때마다 부르던 「암태소작인의 노래」는 당시 농민들의 처참한 처치와 견고한 투쟁의지를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날이 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마음껏 굳세게 뭉치어라/ 이 뼈가 닫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 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그들의 몸에 빛난 옷은 우리의 땀이요/ 그들의 입에 맞는 음식은 우리의 피로다/ 봄동산에 좋은 꽃 지주의 물건/ 가을 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

이후에도 지주측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암태도 소작인들에게 보복하려 했으나 소작인들은 단결했고 끈질기게 투쟁했다. 농노단이 각 마을별로 조직되고, 암태부인회 소작회 청년회도 더욱 연대를 강화했다. 암태도 농민항쟁은 그후 인근 자은도 도초도 지도 등지의 농민항쟁을 크게 자극·고무해 일제하 농민운동의 연대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이 암태도 농민항쟁의 가장 큰 의의이다.

**암태도 항쟁 그이후

1년여의 암태도 농민항쟁은 이후 일제하 조선농민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암태도 농민항쟁의 구체적 결과물인 1924년 8월 30일 지주 문재철과 소작회대표 박복영이 체결한 약정서 내용. 소작료는 지주몫 4할, 소작인몫 5할, 장려농자금 1할로 한다 1923년도 미납소작료는 향후 4개년 사이에 무이자로 분할상환한다 구금중인 형사피고사건에 대해서는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 지주는 소작인회에 기부금 2,000원을 내놓는다. 암태도 항쟁의 이같은 성공은 당시 언론보도를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이는 「소작쟁의의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을 낳는다. 1920년 15건에 불과했던 소작쟁의는 1925년 204건으로 늘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에는 농민항쟁이 소작농 중심에서 자작빈농·자작중농으로까지 확대, 1928년에는 무려 1,590건의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암태도 항쟁과 유사한 또다른 항쟁이 전북 옥구군 서수면 이엽사농장 소작쟁의. 7할5푼이던 소작료를 4할로 내릴 것을 요구한 이 항쟁은 경찰이 조합원 간부를 구속하자 500여 소작인이 경찰주재소를 습격, 구속간부를 탈환하는등 조직적으로 투쟁했다. 일제탄압이 더욱 거세진 1930년대 이후 농민항쟁은 빈농이 주도권을 잡은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체로 변모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농민항쟁은 이와 함께 1920년대 중반부터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체계적인 사회주의운동세력으로 흡수, 성장한다. 1924년 4월 18일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이 대표적 사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운동노선을 택했던 노농총동맹은 강령으로 오인(吾人)은 무산계급을 해방해 완전한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오인은 단결의 위력으로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히 자본계급과 투쟁한다 오인은 노농계급의 현생활에 비춰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을 도모한다 등을 내걸었다. 노농총동맹은 1927년 9월 전국 307개의 산하단체를 거느린 조선농민총동맹으로 확대된다.

한편 항쟁 성공이후 암태도 소작인회는 1925년 1월 4일 회원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 각 동리마다 농노단을 조직키로 하는등 강노높은 투쟁을 결의했다. 소작회는 1926년 1월 18일 암태농민조합으로 변경됐으며, 1927년 3월에는 경제적 투쟁노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조선민족단일당을 결성키로 결의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30-40년대 문지주의 변신. 문지주는 박복영을 통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목포에 문태중학교를 설립하는등 민족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암태도 항쟁의 주역 서태석은 출옥후에도 1931년 하의도 농지반환사건에 연루, 3년간 부당한 옥살이를 했으며 고문으로 인해 1940년께부터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다 1943년 6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김관명기자 kimkwmy@hankookilbo.co.kr

**박천우(朴千佑)장안대교수·한국사

53년 전남 신안군 안태면 출생 80년 동국대 사학과, 84년 연세대 대학원 졸업, 98년 동국대 대학원 박사과정(한국사) 수료 84년부터 장안대 교양과 교수로 재직중, 현재 수원천되살리기시민운동본부장 논문 「한말 일제하의 지주제연구-암태도 문씨가의 지주로의 성장과 그 변동」(84), 「일제하 지주제와 농민운동」(89) 저서 「한국사통론」「한국사강좌」「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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