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졸업후에도 도서관출근 K씨의 하루 -아침이 두렵다. 상실세대 K씨(26)는 새벽 가위눌리다 잠을 깼지만 정신을 차려 둘러본 현실의 무게는 악몽보다 더욱 무겁다. 어제밤 『우리 함께 무너지자』며 먹은 술탓인지 뒷골이 뻐근했다. 지난달 졸업식이후 1주일만에 친구들과 만난 술자리였다.
화제는 언제나 그렇듯 답이 나오지않는 취직얘기. 「00는 인턴으로 들어갔다더라」는 류의 성공담과 공무원시험 준비, 자격증따기등 남들 얘기가 오갔다. 술기운탓에 『까짓거, 우리도 어떻게 되겠지』라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포장마차로 옮겨간 2차에서 어쩔수없이 폭음으로 이어졌다.
얼큰하게 취기도 올랐지만 항상 부러움을 샀던 캠퍼스커플 A의 얘기는 매사 시큰둥해진 그들 모두를 더욱 열받게했다. 여자친구 볼낯이 없어 졸업을 빌미삼아 헤어졌고 여자친구는 휴학한 채 술집에 나간다는 얘기. 『세상은 모두 미쳐가는가, 아니면 우리만 이렇게 미쳐가는 것인가』 구토를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A는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했다. 『우리에게 꽃피는 시절이 있었던가라며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김지하라는 시인이 무화과라는 시를 썼지. 꽃도 피지 못한채 열매를 맺어야한다는게 우리 얘기 아닌가 싶어』
아침 식탁은 언제부턴가 식구들이 모두 피하는 자리가 되어간다. 회사부도이후 실직한 아버지와 공부는 제쳐두고 밴드를 쫓아다니며 연예인을 꿈꾸는 동생, 그리고 4학년들어 줄곳 지켜온 「예비백수」에서 졸업식을 통해 「공식백수」로 자리를 옮긴 k. 누구하나 얼굴을 마주하기도 멋쩍고 서로 해줄 얘기가 없는 탓이다.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받아온 몇달치 월급을 까먹으며 끼니를 해결해야하는 어머니는 파출부라도 나가볼까하는 눈치다.
유복한 두아들을 자랑하며 골프에 몰두하던 아버지와 밍크코트를 하나더 장만할까를 고민하던 어머니. IMF의「폭탄」을 맞은 뒤 1년동안 K의 집 풍경은 너무도 달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가족간의 벽은 높아만 가고 모두는 각자의 방에 갇혀 버렸다.
썰물이 빠져나간 황폐한 갯펄같은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갈 곳도 없지만 늘
버릇처럼 발길은 학교 도서관으로 향한다.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어차피 책보러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졸업 뒷날에는 아는 후배들을 만날까 두려워 자세를 낮추기도 했지만 1주일정도 지나니 될대로 되라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을 둘러보면 고시와 자격증과 실용주의만 살아남은 거대한 공장의 느낌이다. 곳곳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식으로 서로 경쟁자가 되어버린 선배와 동료, 후배들. 저들은 과연 어떤 희망을 갖고 살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도서관 전체를 짓누른다. 가끔씩 누군가 「악」 소리를 지르는 환청마저 들린다.
석양이 깔리면서 새봄의 하루는 끝나가지만 어둡고 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K의 봄은 오지 않았다.
이상연기자 kubrick@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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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세대] '98-99 대졸실업' 손실 10조 넘는다
상실세대의 좌절감은 그들만의 고민으로 끝나지 않는다. 치솟아만 가는 젊은이들의 실업률과 불만은 그대로 크나큰 손실로 사회로 돌아온다.
우선 우수인력의 사장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은 천문학적이다. 지난해와 올해 대졸 실업자 30여만명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조원 가량(연수익 1,500만원 기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산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장상수(張相秀)박사는 『고급 두뇌가 창출하는 부가가치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면서 『대졸 실업자 양산은 경제 성장의 가장 중요한 마이너스 요인중 하나』라고 말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나타날 부작용이다. 장박사는 『인력구조의 연결성이 몇년간 단절되면 사회 조직 체계가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면서 『이같은 현상이 장기화하면 전체 국가경제가 저생산 상태에 빠져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과 여러 사회조직에서는 벌써부터 괴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시한부로 일하게 되있는 인턴사원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직원들이 인턴사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현장에서도 불협화음이 많다』고 밝혔다.
단절을 둘러싸고 신·구세대가 받은 심리적 쇼크도 사회적 병리현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근 서울 M정신과를 찾은 대기업 차장 김모(35)씨는 『직책이 차장이지 밑에 회사에서 직원을 새로 뽑지않아 직원이 한 명도 없다. 브리핑 준비를 위해 3일밤을 새우다 병원신세를 진 후 허탈감과 우울증이 밀려왔다』고 토로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鄭惠信)박사는 『직장에서 밀려난 실직자들과는 달리 상실세대는 명확히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없다』며 『사회 전체에 대한 증오심이나 자아 혐오 현상 등으로 극단적인 행동이 표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연기자 kubrick@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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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세대] 학문은 사라지고 취업준비반 전락
상실세대들이 느끼는 사회적 박탈감은 나아가 대학전체를 왜곡시키고 있다. 재학생들이 선배의 고민과 차가운 사회 현실을 체감하면서 「실용주의」로 돌아서고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학문은 사라지고 오로지 취업만 남은 셈이다.
지난해부터 나타난 과목 선택의 양극화 현상은 이번 학기 가장 기승을 부리고 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만 수강생이 몰리는 바람에 인기가 없어 폐강되는 과목이 대학별로 최고 60개나 된다. 인문교양과 기초과학이 대표적인 퇴출 과목. 반면 외국어나 경영학 등은 새벽부터 줄을 서야 수강신청이 가능할 정도다. 서울 K대 양모(24)씨는 『일부 학생들은 취업준비를 위해 무료과정인 교내 실직자 특강 등에도 참가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대학 전체가 국가시험 준비반처럼 변해가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서울대앞 고시촌에는 대략 1만7,000여명이 고시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측은 『그중 40%인 6,800여명이 서울대생이고 그중 절반인 3,000여명이 재학생, 또 그중 30%가 비법대 학생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서울대 전체 학생 2만명 가운데 예체능·이공계 학생을 제외하면 30% 가까운 재학생들이 고시준비를 위해 대학을 다닌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서울 H대 서모(25)씨는 『상위권 대학이나 전공 학과 학생은 사법·행정·외무고시를, 중하위권 대학이나 비전공 학과 학생은 7,9급 공무원 시험이나 자격증 시험을 노리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모두가 경쟁상대로 변한 교내 분위기는 「개인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다. 교내및 사회문제보다는 실업문제에 대한 관심이 우선하는 상황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투표율 미달로 재선거를 치러야 하는 대학이 9개나 되고 아예 후보가 나서지 않은 대학도 2곳이다. 서울 K대 총학생회 관게자는 『요즘 고되고 힘든 학생회 일을 기피하려는 현상이 일반화했다』며 『단과대 4곳이 학생회장 입후보자가 없어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주훈기자 june@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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