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밀원 회의록 첫 공개「추밀원 회의필기(회의록)」발굴로 일본이 한일병탄조약을 서둘러 체결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 자료와 「조선총독 보고 조선병합 시말」, 당시 일본 내각과 조선통감부를 오간 전문 일체를 검토하면 한일병탄조약 체결 전후 일본의 움직임을 낱낱이 알 수 있다.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 및 이에 관련한 칙령안 12개 조는 어느 것이나 긴급을 요해서 여느 때와 같이 심사 요청보고서를 작성할 틈이 없었으므로 구두로 보고하겠습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탄조약안 심의에 들어가면서 일본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직원이 추밀원 의원들에게 한 보고다.
시간이 없어 조약안 내용을 말로 들려줄테니 심의·의결하라는 얘기다. 당시 최고통치권자인 천황의 자문기구가 한 나라의 국권을 빼앗는 조약안 심의·의결을 심의를 위한 서면자료 하나 받지 않고 처리했던 것이다.
불과 몇 분만에 조약안은 전원 일치 (기립)찬성으로 의결된다. 이어 「조선에서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등도 일사천리로 가결된다.
추밀원은 이날 오전 11시 45분 회의를 마치고, 메이지 천황의 최종 재가를 요청하는 상주안(上奏案)을 올린다. 추밀원은 절차를 지키기 위해 애썼으나, 서울의 데라우치 마사케(寺內正毅)통감은 이를 무시했다.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李完用) 총리내각대신은 이날 오후 4시에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했다. 이 시간은 서지학자 이종학(李鍾學)씨가 수년 전에 발굴한 「조선총독 보고 조선병합시말」을 비롯한 자료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반면 일본 내각이 조선통감부에 천황의 재가사실을 알리는 전문이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 30분임을 알 수 있다. 이관장과 함께 이 문서들을 검토한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국사학과)교수는 『조약 체결일 오후 6시30분 조선통감부는 일본 내각에 두 번의 전문을 쳤는데 먼저 친 전문에는 천황의 재가사실을 받았다는 사실이 없고 두번째 전문에야 내용이 나타난다』며 『이는 오후 6시30분 천황재가 사실을 통보받은 후 급히 전문을 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관장은 『1910년 8월 중순께 일본에는 엄청난 홍수가 져 추밀원 회의도 예정보다 45분 늦게 시작되고 전문 착발신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며 『하늘이 천재(홍수)를 내려 일본의 조선 강점을 막았다』고 말했다.
/서사봉기자 sesi@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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