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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자칼럼]버스안에서

입력
1999.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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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내에 계신 형님 누님 아저씨 아주머니, 바쁘신 와중에 잠깐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린 놈이 당돌하다고 비난마시고…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어린 싹을 외면마시고 껌 한 통씩만 팔아주시기 바랍니다』버스 안에서는 가끔 어린 청소년들이 이렇게 물건을 판다. 게슴츠레한 눈동자에 남루한 복장. 누군가 써준 것이 틀림없는 「대본」. 「껌 한통」을 외치는 아이들에게는 그러나 쉽게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살아보려는 의지를 빌미로 껌 한 통에 500원씩, 1,000원씩 파는 상술이 미덥지 않다. 그 돈이 어쩌면 앵벌이 소년의 피를 빨아먹는 조직으로 들어갈 지도, 본드를 사는 비용으로 쓰일 지도 모른다. 『90년 ○○일본에 보도됐던 금은방 강도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로 시작하는 공포형,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닳아빠진 메모지를 돌리는 침묵형 등 버스안의 상행위는 다양하다.

얼마 전 버스 안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IMF의 희생자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는 『건실한 중소기업의 과장으로 살아가던 저는…』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주변없어 보이는 외모에 다 말투가 그런 설명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뭘 팔까? 3분여 후 그는 드디어 물건을 꺼냈다. 나무 주걱이었다. 『○○신문에서 보도된 바와 같이 플래스틱 주걱에서는 환경호르몬이 나와…』하더니 나무 주걱의 장점을 설명했다. 튀김젓가락, 죽을 쑬 때나 깨를 볶을 때 요긴한 손잡이가 긴 나무 숟가락 두 개, 대나무 젓가락 다섯 벌 등 5종에 3,000원이면 괜찮은 가격이다. 하나 샀다.

이 정도면 버스 안의 거래로 적당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정심을 발휘하기에 우리의 주머니는 너무 얇다. 파는 사람도 떳떳하고, 사는 사람도 뒤끝이 깨끗한 거래가 나는 좋다. 베푸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호주머니와 상대방의 양심을 저울질하도록 만드는 대신 「기꺼이」 지불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자선의 모델이 아닐까? 버스 안에서 물건을 「조금」 비싸게 사는 것도 만일 자선에 든다면 말이다. 박은주 문화과학부기자 jupe@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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