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의자왕의 아들
1999/02/18(목) 17:36
낙양(洛陽)문물 명품전은 지도층 인사들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설 연휴중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 이 전시회를 둘러보며 민족과 국가를 배반하면 길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진리를 재확인하였다. 부여와 낙양시가 우호관계 협정 체결 2년을 기념해 두 도시 박물관 공동주관으로 마련한 전시회는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백제 임금 의자왕의 아들이 당나라에 부역한 사실이다.
■전시회장에는 나당 연합군에 패한 뒤 부왕과 함께 당나라에 잡혀간 부여융(扶餘隆)의 묘지(墓誌) 탁본사진이 전시돼 있다. 1920년 낙양 북망산(北邙山)에서 출토된 묘지석에는 『백제유민들이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치고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했다』고 적혀있다. 이 때 당나라 괴뢰정권인 웅진(熊津) 도독이었던 융은 제나라 재건운동 진압에 공을 세웠으니 품성이 고결하고 학덕이 높았다는 찬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임존성(지금의 예산땅)을 거점으로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다 당에 투항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 사진도 전시됐다. 정복자의 나라에 들어가 융을 도와 웅진도독부 관인으로 부역하던 그는 백제 부흥운동을 무력으로 잠재운 공로로 당나라 정규군 지휘관이 되었다. 돌궐과 토번을 무찌르는 데도 공을 세워 외몽골 지역을 관장하는 총독자리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아 투옥돼 옥중에서 자결했다.
■안팎에 용명을 떨친 고구려 무장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泉男生)도 비굴하고 치욕적인 기록을 남겼다. 연개소문 사후 실권을 세습받은 그는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에 투항, 고국침공의 선봉장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당에 망명해 관작을 받아 안락하게 살다가 46세에 죽었다. 세 사람의 이름은 모두 당나라가 지어준 성으로 기록됐지만, 1,300년이 지나 한 개의 돌이 그 치욕을 고발하였다. 역사는 무섭다.
/문창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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