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신정'을 바꿨으면
1999/02/12(금) 17:30
17세 고등학생에게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에게는 그끄제 그제 어제 오늘…모레 글피 그글피 등이 있으나, 유독 「내일(來日)」은 한글이 아니라 한자라는 것이다. 국어 선생님은 이어 『우리 민족에게 하루 뒤의 날을 가리키는 미래지향적 말이 없었을 리 없다. 문헌을 보면 옛날에는 내일이 아니라 「새재」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내일」부터 나흘 간의 설연휴를 맞는다. 근래 설처럼 수난을 겪은 명절도 없다. 명칭에서부터 혼란을 겪고 휴무기간이 늘고줄기를 거듭하면서, 명절로서의 존엄성이 상처를 입었다. 한 때는 「구정」이었다가 「민속의 날」로, 다시 설로 환원되었다. 편리한 대로 「음력 설」로 불리기도 했던 설은 우리 고유의 시간개념과 아시아적 문화전통, 고집을 반영하는 소중한 흔적이기도 하다.
■혼란 속에도 「양력 설」인 신정(新正)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구정의 상대어로 붙여진 신정은 구정이라는 명칭이 사라져도 건재하고 있다. 달력마다 1월1일을 신정으로 표기하고 있다. 민족의 새해 첫날을 일컫는 중요한 말이 이렇게 고식적으로 탄생하고 정착돼 가는 것이 참으로 씁쓸하다. 일본에서는 1월과 설(양력)을 함께 쇼가쓰(正月)라고 부른다. 신정과 구정은 일제통치의 잔재이기도 하다.
■엊그제 정부의 한자병기 추진방침이 발표됐을 때, 한글학자들이 우려한 것의 하나가 우리다운 글살이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우리다움을 위해 신정이라는 말도 바꿀 때가 됐다. 언제까지 「내일」도 없고 「신정」도 없어야 하는가. 정월 초하루가 영어로는 우리의 「새해 첫날」에 가까운 「뉴 이어스 데이」다. 국어 선생님의 「새재」라는 말처럼 새날, 새해의 날, 새해 첫날 등 어감 좋은 말들을 떠올려 본다. /박래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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