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한문전쟁
1999/02/12(금) 18:02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글과 한자의 대전사(大戰史)다. 국한문(國漢文)간의 대결의 역사요 갈등의 역사다. 그러면서도 50년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세기를 마지막 보내면서 또 한바탕 열전이 붙었다.
한 나라의 어문(語文)은 주권이나 영토나 국민과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구성요소다. 그 어문을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된 것은 심각한 일이다. 하도 장기전으로 끌어온 것이라해서 단순히 해묵은 논쟁쯤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국민의 생활자체요 국운과도 직결된 것이다. 우리 국민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통일과제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 공포된 이후 이번 정부의 새 결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국어문자의 정책이 여러 차례 바뀌어 온 것은 좋게 말해 시행(試行)을 통한 공청회 과정이었다. 일찍이 이렇게 긴 공청회도 없었다. 동어반복(同語反覆)과도 같은 지루한 논쟁은 종점이 어디일 것인가.
한글전용이냐 한자겸용이냐의 싸움은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나라의 이념논쟁처럼 되어왔다. 사실 그 속에는 사상이 들어있다. 정치적 이념 갈등이 마감되어 가는 마당에 국한문의 대결은 새로운 세기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이왕 다시 터진 것이라면 소모적인 전쟁은 이번 기회에 20세기와 함께 일단 끝내는 것이 좋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9일 공문서 한자병기와 함께 관광진흥을 이유로 도로표지판의 한자 겸용 방침을 내놓았다. 물론 도로표지판이 부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얼른 듣기에 한 나라의 어문정책이 관광에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국어(國語)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아무리 관광의 실용성이 어문정책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관광을 향도(嚮導)로 내세우는 것은 국어정신의 결핍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 필요성을 정면으로 더 근본적인데서 찾아야 한다.
나는 한글전용이나 한자겸용의 논쟁에 끼여들 생각은 없지만, 굳이 손을 들어 보라면 단연코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쪽이다.
한자의 유용성을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고 있을 계제는 아니다. 단 한가지 측면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우리말은 낱말의 70% 가량이 한자어라고 한다. 이 낱말들이 다 한자로 표기하지 않는다고 뜻이 안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를 표기하지 않으면 모호해지고 무미(無味)해지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낱말들은 한글전용을 할 때 자연히 기피당해 사용 빈도수가 낮아지고 결국 언젠가는 저절로 퇴출 당하게 된다. 낱말의 강제추방이다.
또 낱말의 생산성에도 문제가 있다. 말은 자꾸 새로 생겨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자의 조어력(造語力)을 따라 갈 수 있는 문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한자는 무한한 낱말의 보고(寶庫)요 창조자다. 한글전용은 낱말의 산아제한이다. 한자가 순수한 우리말의 자생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 양으로는 비교가 안된다.
국어의 크기는 어휘의 크기다. 국어의 힘은 나라의 힘이다. 한 나라의 국력의 크기는 그 나라 표준사전의 부피다.
말은 많아 좋을 것이 없더라도 낱말은 많을 수록 좋다. 풍부한 어휘는 표현력을 윤택하게 하지만 그 보다는 사고력을 넓히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이다.
사람은 말로 생각한다. 말이 짧으면 생각이 짧다. 사고력은 어휘에 비례한다.
말은 생각을 규정한다. 우리말로 생각할 때와 외국어로 생각할 때는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같은 우리말이라도 한글의 어휘가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한자의 어휘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각각 한계가 있다. 가령 한글식 사고방식만으로는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기가 어렵다. 제한된 어휘는 사고방식을 제한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생각」이다.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도 하고 정보의 세기라고도 하고 지식의 세기라고도 하지만 한마디로 「생각의 세기」다. 생각 없이는 새로운 시대의 국운을 개척해 나갈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대를 바삐 뛰어오느라고 깊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지 않았던가. 큰 발명을 내놓은 것도 없고 큰 사상을 낳은 것도 없다. 모든 창조와 창의는 생각에서 나온다.
나라의 생각을 키워야 한다. 그 밑거름이 생각의 원자(原子)인 국어의 어휘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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