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진단] 어문정책, 정권과 함께 춤을?
1999/02/12(금) 16:57
백년대계가 없다. 「청사진」 없이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온 우리의 국어 문자정책. 갑작스런 행정부 공문서의 한자병기 논란을 계기로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어문정책을 수립해야 하고 그에 상응한 조직과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부처간 협의나 국어심의회와의 조율 없이 졸속적으로 추진되는 한자 병기. 시급히 필요한데도 1년 가까이 유보 중인 로마자 표기법 개정이 국어문자정책의 현주소를 짐작케 한다.
건설교통부는 97년 1월부터 4,000여억 원의 예산으로 전국 10만여 개 도로표지판 교체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로마자 표기법은 개정 중에 있어 내용이 확정되면 지금까지의 작업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98년 12월까지 건교부가 쓴 예산은 1,100억원.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지난 해 4월 현행 로마자 표기법과 원칙과 내용이 전혀 다른 개정 시안을 마련해 놓고도 이 해 가을 개정작업 유보라는 내부방침을 정했다. 발음보다 철자 옮김을 중시하는 개정시안에 대해 반대 여론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번 한자병기 방침은 쉽게 결정했을까? 이유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철냄비 죽끓듯」하던 우리 어문정책의 역사를 보면 이번 한자병기 추진은 별로 「파격적」일 것도 없다. 한글 전용_한자 혼용_한글 전용_한자 병용. 우리의 어문정책은 정권에 따라 너무 쉽게 변했다.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변화는 결국 혼란과 퇴보, 낭비다. 이번 한자병기 방침은 통치권자의 의중에 따라 별 준비도 없이, 국민이 겪어야 할 혼란에 대한 아무런 배려없이 전격 발표됐다.
극어학자들은 『우리나라에는 어문 행정은 있되 어문 정책은 없다』고 지적한다. 당연하다. 우리의 어문정책은 문화관광부의 일개 과(課)에서 관장한다. 어느 선진 국가에도 없는 일이다. 이어령(李御寧)문화부장관 시절 정부수립이후 처음으로 어문정책을 관장하는 국(局·어문정책국)이 생겼다. 잠깐이었다. 수없는 정부 조직개편과 군살빼기라는 명분 하에 「어문정책국」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국어정책과」하나다. 그러나 전문위원 한 명 없다. 국어심의회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문기구일 뿐이다.
선진외국의 경우 어문 정책은 대체로 독립된, 그리고 권위있는 전문가들이 모인 기구가 관장한다. 단어 하나를 바꾸는 데 나라가 들썩거린다. 모국어에 대한 긍지가 유달리 강한 프랑스의 경우 언어를 지키고 갈고 닦는 데 들이는 노력은 엄청나다.
한 나라의 어문정책을 바꾸는 데 「외국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라는 이유를 한 가지로 댔다는 것은 실로 부끄럽고 한심한 발상이라고 국어학자들은 지적했다. 이번 한자 병기 방침을 계기로 「어린 백성을 안타깝게 여겨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이 살아있는 장기적인 어문정책의 수립이 절실하게 논의돼야 한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서사봉기자 sesi.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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