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론] 지연작전의 지혜(이찬근 인천대교수)
1999/02/10(수) 15:03
지난 1월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항상 미국과 보조를 맞추면서 일본 성토론에 가담해왔던 유럽과 캐나다가 이번에는 태도를 일변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자유화의 문제점을 일본과 함께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이른바 초국적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론이 대세를 형성했다. 궁지에 몰린
미국은 보호무역주의 경계론을 부각시키며 상황타개를 노렸다. 자국은 3,00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감수하며 세계경제에 공헌하는데 유럽과 일본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정이 바뀌지 않는 한 미국의 업계와 의회는 자칫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위협했다.
이처럼 미국은 투기자본문제로 수세에 몰리자 통상문제를 거론함으로써 관심의 초점을 바꾸는 전략을 구사했다. 어찌됐건 금년 한 해는 통상마찰의 해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연초부터 슈퍼 301조가 부활하면서 그 전조를 보이고 있다. 물론 미국의 일차적인 표적은 일본과 유럽 혹은 중국이 되겠지만 우리나라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다. 지난해 11월 미국의회가 IMF에 대한 180억달러의 출연금을 승인하면서 한국조항을 집어넣고, 한 푼이라도 한국의 6대 산업 -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 섬유 의류 - 에 지원돼서는 안된다고 못박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더 이상 미국의 전략적 배려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냉엄한 우리의 현실이다.
현재 한미간에는 수다한 통상문제가 걸려 있다.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하라」 「철강보조금을 없애라」 「수입고기의 유통차별을 철폐하라」 등등은 몇가지 예에 불과하다. 이처럼 업종마다 건건이 걸려 있는 마찰의 소지를 없애고자 한국정부는 지난해 상반기 중 한미투자자유협정을 서둘러 제안했다. 어차피 미국은 시간소모가 많은 다자간 협상채널에는 관심이 없고, 매사 양자 협상을 통해 목을 조여오므로 차라리 우리쪽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 편이 종합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인식에 따른 것이다.
또한 한 푼이라도 외환확보가 시급했고 신인도 제고가 절실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정부가 내놓은 투자협정안은 국내에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일본과도 투자협정을 추진하자는 의견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급박한 외화유동성 위기가 일단 수그러들었다고 볼 때, 정부의 대미 통상전략은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하에서 세계무역이 크게 신장했다는 점을 중시하여 자유무역이 기본이고 보호무역은 퇴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과연 그러할까. 오늘날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무역의 선봉장인 미국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보호주의 국가였으며, 70년대 이후 미국이 표방하고 있는 상호주의는 자국시장의 봉쇄가능성을 무기로 하는 보호주의의 변형일뿐이다. 다시 말해 60년대 말까지의 미국이 「자신감의 미국」이었다면 이후의 미국은 「초조감의 미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나라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미명 아래 미국식 자본주의의 관철을 요구하는 미국의 모습은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하여튼 오늘날의 미국은 조바심 속에서 많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 투기자본의 폐해가 속출하는 가운데에서도 국제적인 자본규제를 반대하고 있고, 자신이 만든 세계무역기구(WTO)의 정신과 정면배치되는 슈퍼 301조를 부활시키고 반덤핑규제, 수출자율규제, 수입자주확대 압력을 자행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미국의 만용은 어떤 형태로건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따라서 협상력이 없는 우리 정부는 매사 졸속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복병의 출현으로 사정이 개선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이 일본두들겨패기를 감행할 때마다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려 시간의 경과에 문제해결을 맡겼던 일본관료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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