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 재정구의원] 낮은곳 행했던 '빈민들의 대부'
1999/02/10(수) 08:25
제정구(諸廷坵)의원이 9일 폐암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은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눈시울을 붉게했다. 일찍이 희어진 머리처럼, 그의 짧은 55년은 청빈과 순백의 삶이었으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고행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제의원은 독재권력에 맞선 민주화 운동가이자, 빈민운동을 해온 실천적 지식인이며, 깨끗한 정치를 지향한 올곧은 정치인이었다. 굳이 막사이사이상 사회부문 수상을 들지 않더라도, 그는 항상 낮은 곳을 향하고 정의를 추구했다.
오래전 한 언론에 실린 제의원의 자전 에세이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뜨거운 숨소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시커먼 시궁창에서 붉은 연꽃이 피듯 도시의 응달 판자촌에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 세워진다. 민주도, 자유도, 진리도 이들이 주역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말장난이다. 그들의 삶은 나에겐 늘 부끄러움이요 천둥소리였다. 빚더미 삶. 아무래도 이 세상에선 다 못 갚을 것 같다』
경남 고성출신(44년)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제의원은 74년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는 등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중 제의원은 도시빈민의 고통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때가 72년. 그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보장된 삶을 던져버리고 서울 성동구 판자촌에 들어가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77년 서울 양평동 철거민 170여가구를 위한 「보금자리 마을」을 경기 시흥시 시흥동에 세웠다. 이후 경기 시흥시 신천·은행동 일대에 700여 가구의 철거민 마을을 세우는 등 빈민을 위한 삶은 계속됐다.
그가 병마와 싸우던 지난해 12월, 민주화투쟁 동지들과 재야출신 의원들이 「주인공 없는 후원회」를 개최했을 때 과거 「빈민」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던 사실은 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그의 정치역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입문시절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으며 한국정치의 파당성 탓에 한겨레민주당, 민주당, 한나라당을 거치는 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이력에는 뇌물이나 정치자금의 추문은 한 점도 없었다. 폐암 말기를 선고받은 후에도 국정감사장에 서면질의서를 보내는 처절한 정성에서 그의 정치도 올곧은 삶의 연장이었음이 잘 드러난다.
제의원이 부인 신명자(申明子)씨와 세 딸에 남긴 유산은 보금자리 마을의 18평 슬레트집과 빚 7천만원.
/이영성기자 leeys@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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