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론] 내각제개헌의 유령(임현진 서울대교수)
1999/01/21(목) 17:37
우리 사회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바로 내각제 개헌이다. 내각제 개헌 문제가 수면 위아래를 넘나들면서 순수내각제와 이원집정제의 두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매우 혼돈스럽다.
현행 권력구조의 형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독일식 순수내각제로 바꾸는 헌법개정을 올해 12월말까지 완료한다는 합의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지난97년 대통령선거 전에 만든 것이다. 헌정사 50년만에 선거혁명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져온 이른바 「DJP연합」의 고리가 바로 내각제 개헌이었다.
이는 내각제 개헌이 애초 대통령중심제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의지에 앞서 집권도구로 편용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통령중심제를 내심 선호한 국민회의가 대선승리를 위해서 차차기 대권에 미련을 가진 자민련을 끌어들이려고 내각책임제라는 차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처럼 내각제가 정당연합을 통한 집권의 방편으로 악용된 것은 문민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3당야합」의 연장선에서 「2당불륜」에 의한 국민정부의 탄생을 보아도 무방하다. 이것이 한국민주주의의 현주소이다.
우리 국민은 내각제개헌에 대해 모순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다수가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면서도 내각제개헌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이중적인 입장이다. 정치불신의 감정이 혐오의 단계까지 이른 국민으로서 내각제가 좋다기 보다 약속이 지켜지는가를 끝까지 기다려보겠다는 생각이다. 일단 「제도」보다 「사람」에 비중이 두어져 있다.
분명 내각제개헌은 대선공약이라는 점에서 국민에 대한 중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당시 유권자의 40%정도가 「DJP연합」에 찬성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내각제 개헌은 국민 다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상당수 국민이 내각제 개헌에 담담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각제 개헌은 우리 미래가 달려있는 국가적 대사이다. 권력논리로 접근하다가는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종필총리라는 두 「오너」사이의 무릎대화에 의해 담합될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주된 책임은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에 있지만 야당인 한나라당도 책임면제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IMF사태를 미처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합의된 내각제 개헌을 위기극복 이후로 미루자는 국민회의의 주장도 옹색하거니와, 정경유착을 가져온 대통령제를 내각제로 바꿔야만 제2의 IMF를 막을 수 있다는 자민련의 항변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 내각제 개헌 논쟁을 두 여당의 갈등으로 이끌어 공동정권의 틈새를 파고들려는 한나라당의 자세 또한 당략적이다.
필자가 가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원집정제 개헌이다. 이원집정제는 정당정치와 정치문화가 틀 잡히지 않은 곳에서는 정국혼란과 국정난맥을 가중시키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얼마전 국회파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의회주의와 삼권분립이 정착되지 않은 우리 정치에서 이원집정제는 권력분점이라는 이름 아래 분열과 야합의 악순환을 몰고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집정제는 경쟁세력에게 집권의 기회를 넓혀줄 뿐만 아니라 후견정치를 통해 오너의 퇴임후 신분보장을 확실히 해 준다는 면에서 권력자들에게 매력적이다. 최근 청와대의 내각제개헌 시기조정론의 앞뒤를 살펴보면, 동서화합이라는 명분아래 나타날 「거대여당」에 의해 정계개편의 가닥이 잡히는 시점에서 이원집정제가 공론화될 기미가 없지 않다.
현실정치엔 동상이몽 은 있어도 동고동락은 드물다. 내각제개헌 문제를 보면 기묘(己卯)년의 정국이 기묘하게 돌아갈 것 같다. 바른길로 가야 모두가 산다는 기묘년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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