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막은 판자촌 인심
1999/01/19(화) 23:54
자신의 재산보다 이웃의 생명을 먼저 걱정하는 판자촌의 인심이 대형 참사를 막았다.
19일 한밤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무허가 목조건물 117채가 불에 타 400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송파구 장지동 화훼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잃어 망연자실해 하면서도 단 한사람의 인명 피해도 없었던 사실에 안도했다. 소방차 68대와 소방관 360여명을 출동시켜 1시간20분만에 어렵게 불길을 잡은 소방당국도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낡은 목조건물이 순식간에 탄데다 가정용 LP가스통 수십개가 폭발하는 아수라장에서 어떻게 한사람의 인명피해도 없었는지 신기하다』며 『자신의 재산보다 이웃의 생명을 더 고귀하게 생각한 판자촌의 끈끈한 인심이 참사를 막았다』고 말했다.
이 마을 주민들이 순번제로 운영하고 있는 방범 순찰대원 3명이 불을 처음 발견한 것은 새벽2시20분께. 음력 12월 초이튿날로 칠흑같이 어둡고 인적도 드문 시간, 매캐한 냄새가 번지면서 판자촌 끝자락에서 원인모를 불길이 피워오르는 것을 한 순찰대원이 발견, 주민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주민 노미자(43·여)씨는 『누군가가 「불이야」 소리쳐 깨어보니 장롱너머 창으로 불길이 보여 가족들을 모두 흔들어 깨워 밖으로 내보내고 옆집으로 바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노씨가 밖으로 나온 순간 불은 이미 비닐하우스 건물 2개동을 삼키고 낡은 목조건물을 태우며 거세게 번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가재도구나 귀금속 현금 등을 챙기기 보다 너나 없이 불길 속을 달려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이웃을 깨워 대피시키기에 바빴다.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비닐하우스촌을 빠져나와 탄천뚝방 아래로 안전하게 대피하고 누군가의 신고로 소방차 수십대가 도착한 순간 가정용 가스통이 굉음을 내며 잇달아 폭발하기 시작했다. 몸만 빠져나온 주민들은 빈털터리가 된 채 보금자리가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더 이상 잠에 빠진 주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렸다.
날이 밝자 동전 한닢이라도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잿더미속을 뒤적이던 주민 조원형(56·노동)씨는 『큰 불에도 동네사람이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아 큰 다행』이라면서도 『추운 날씨에다 끼니와 잠자리 걱정 등 겨울 날 일이 아득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85년 조성돼 현재 217가구 8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은 95년 10월 화재로 12개동이 불타는 쓰라린 경험을 한 이후 화재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자체 순찰대원까지 구성해 화재 등 재난에 대비해왔다.
경찰은 이 마을이 대부분 낡은 건물인데다 방화 흔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일단 전기합선이나 난로과열, 누전에 의해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화재원인을 조사중이다. 송파구는 마을회관에 이재민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식량 등을 지급,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김호섭기자 dream@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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