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씨의 호소] "아버지 만나게 해주세요"
1999/01/15(금) 17:36
『남북한당국에 공개적으로 호소합니다. 50년 전 서른다섯살의 가장이 노모와 뱃속에 아이가 있는 젊은 아내, 4남매를 버리고 월북했습니다. 그는 이제 여든다섯의 노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소설가 이문열(李文烈·51)씨는 6·25 당시 월북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85)씨로 부터 지난달 편지를 받은 사실이 한국일보에 보도되자 『이제 공식적으로 「아버지 찾기」에 나서겠다. 북한 최고당국자에게도 선처를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길이 열리면 북한에 가겠다. 옌지(延吉) 투먼(圖們)에서라도 만나 뵙겠다』며 『가장 바라는 것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땅을 밟도록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원철씨 일가는 재령이씨 영해파의 종문. 월북 전까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에서 400여년을 살아왔다. 이문열씨는 『지금도 명절때 고향을 가면 둘러봐야 할 산소가 30기나 된다』고 말했다.
이씨가 편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 87년 받은 편지는 그 내용과, 농경제학자인 아버지가 연구복을 입고 찍은 컬러사진으로 볼 때 북한당국이 「허용한 분위기」가 있었다. 83, 84년께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작품을 알고 있는듯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에 대해 『네가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너무 섬세한 것에 매달리는구나』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조국은 아직도 나의 실존이다. 굴종과 예속은 집안 대대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썼다. 두번째 편지에서는 아들, 딸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안부를 물었으나 자신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동봉한 흑백사진은 북한에서 재혼해 낳은 5남매와 함께 찍은 것으로, 머리가 허옇게 세고 벗겨진 노인의 모습이었다. 이씨는 그러나 이 사진을 공개하는 것은 고사했다.
이씨는 첫 편지를 받은 후 여러 경로로 상봉을 시도했다. 92년 중국 방문당시 만나려던 생각은 무산됐다. 94년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방북해 만날 기회도 있었다. 첫 편지에서 자신에 대한 언급이 없어 서운해 하던 이씨의 어머니(96년 작고)는 당시 『나도 따라가면 안되나.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이후 이씨는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 북한 이복형제들과의 만남을 가상해 남북문제를 다룬 중편 「아우와의 만남」을 94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두살때 헤어진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다. 만난다면, 첫 마디는 무엇일까.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 시대가 지나갔는데 아버지 당신의 선택은 보람을 찾으셨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원망, 후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천=하종오기자 joha@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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