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이혼(서화숙 문화과학부차장)
1999/01/13(수) 18:48
먼 친척 중에 일흔이 다 되어서 남편과 별거를 한 할머니가 계시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과는 진작에 헤어지고 싶었지만 자식들에게 어머니로서 도리를 다하다보니 그렇게 늦어졌다. 남편의 마지막 첩이 낳은 아이까지 혼인을 시키고나니 어느덧 황혼줄. 그래도 사업가인 남편은 아내의 사주에 돈이 들어 있다며 이혼을 동의해주지 않았다. 결국 별거하면서 생활비를 풍족하게 받아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늙으막에 혼자 되어 돈쓰는 재미로 사는 삶은 공허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굴욕적이진 않다.
최근 들어 늙으막에 이혼을 신청한 이시영(72)할머니와 김창자(75)할머니가 줄줄이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황혼이혼이 화제가 되고 있다.
두 할머니의 삶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할아버지들이 30억원과 15억원대의 부자이면서 아내에게 지독히도 인색했다는 점이 닮았고 무엇보다 둘 다 폭력을 휘둘렀다. 아내의 인격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결혼은 진작부터 깨져 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할머니들의 상담을 맡아온 여성단체인 여성의 전화에 따르면 할머니들은 「자녀들 때문에」 참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은 「몸이 견뎌낼 수 없어서」 이제라도 나의 삶을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폭력에 오래 시달린 사람은 폭력에 익숙해져 인간으로서 자부심을 잃어버리기 십상인데 할머니들은 뒤늦게라도 인간의 권리에 눈을 떴다. 그 권리를 지지해주어야 우리 사회는 민주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부의 입장은 달랐다.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을 무시하고 학대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혼인 당시의 가치관에 비춰보면」 할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는 당연한 것이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해로하라는 것이다.
더구나 재판부는 희생을 당해온 할머니의 권리는 걱정하지 않고 혼자 될 할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며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할머니가 참으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다. 만일 젊은 사람이 똑같은 이유로 이혼을 신청했다면 받아들이겠지만 노인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인가. 당시의 가치관이 판결기준이라면 사법부는 정부수립 이전에 출생한 사람에게는 경국대전으로 판결을 내리겠다는 것인가. 참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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