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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타향」에서 떠난 손목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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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타향」에서 떠난 손목인씨

입력
1999.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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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타향」에서 떠난 손목인씨

1999/01/11(월) 19:00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씨의 생은 영원한 「타향살이의 삶」이었다. 일본 미국 등에서 오래 살았던 그는 죽음조차도 그가 작곡한 수많은 작품만큼이나 애환이 서린 타향 일본에서 맞았다. 자신이 작곡한 노래의 저작권문제를 협의하러 일본을 방문했다가 뜻밖에 마지막 길을 떠난 것이다. 그는 갔어도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로 대표되는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영원히 우리민족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그는 한국가요계의 큰 별이었다. 고 박시춘(朴是春)씨와 함께 한국가요의 황금기를 열었던 한국가요사의 양대산맥이며 중심 축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영원한 노래인 「타향살이」와 「목포의 눈물」로 나라 잃은 한을 달래고 나라를 되찾을 결의를 다지게 해주었다면, 6·25동란 때는 「슈샤인보이」등으로 참상을 전하고, 「아빠의 청춘」으로 실의에 빠졌던 아버지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그가 21세때인 1934년에 작곡한 「타향살이」와 35년에 내놓은 「목포의 눈물」은 한국가요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한국가요의 첫 황금기를 연 것이다. 「타향살이」와 「목포의 눈물」의 폭발적인 인기는 가요가 가질 수 있는 힘을 우리민족에게 보여줌으로써 근대음악에 관심을 갖게하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60년대 저작권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그였다.

이처럼 우리민족은 그가 남긴 노래 1,000여곡과 함께 20세기를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잃었다가 되찾고,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고 경제발전을 이뤄나가는 동안 그의 노래는 항상 우리 옆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흘러간 노래」에 대한 정서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만큼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래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金貞九)씨에 이어 손목인씨의 죽음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도 손목인씨를 보내는 국민들의 관심은 너무 엷기만 하다. 박시춘씨나 김정구씨를 보낼 때도 그러했지만, 손목인씨의 부음이 전해진 후 국민들의 감사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그보다 못한 사람도 기념관을 짓고 그 발자취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손목인씨는 먼 타향으로 떠났지만 그가 남긴 노래가 앞으로도 우리와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업적에 감사하고 기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는 문화와 예술의 맥을 이어 발전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손목인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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