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민과 관의 싸움
1999/01/07(목) 18:03
지금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싸움을 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이 나라에 무엇 때문에 있는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화장실에 가면서도 그 곳에 가야 하는 명분과, 그 곳에 가서의 행동방향을 기자회견과 성명을 통해 발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쯤으로 생각하며 산다. 그들이 없다고 별로 불편할 것도 없을 것같다.
정치인들의 싸움은 눈에 잘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대판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만나고 모여서 놀기도 잘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다른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예술행사를 둘러싼 민과 관의 싸움이다. 2000년에 열릴 제3회 광주비엔날레와 9월로 예정된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는 주관하는 지자체와 실질적으로 행사를 이끌어갈 예술가집단 간의 갈등 때문에 제대로 치러질지 걱정스럽다. 광주비엔날레는 전시총감독의 해임과 전시기획위원들의 집단사퇴, 범미술인위원회의 거센 개선요구로 마찰이 확산되고 있다. 연극인들은 과천시가 관주도로 행사를 치르려 한다며 불참을 선언하고 따로 행사를 벌이겠다고 나선 상태이다.
이처럼 민과 관이 갈등을 빚는 주요 원인은 추진주체와 전문가집단 간의 역할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관은 아직도 문화예술인들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며 문화와 문화예술인에 대해 전통적 전근대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기금까지 조성돼 있는 행사에서는 돈싸움냄새가 풍긴다. 우리 지역행사는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지역정서가 외지의 예술인들에 대한 배타행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격요건에 맞는 적임자를 배제하고 자격이 불충분한데도 우리 지역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임용하는 식의 문화행정으로는 국제적 행사로 발돋움하기 어렵다.
문화행정의 담당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원도 하고 간섭도 한다. 아니, 지원은 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하고 간섭은 되도록 많이 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예술인들을 들러리 삼아 관의 위엄을 치장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어떤 경우에는 관이 민을 불편하게 만든다. 예술의전당은 한 해동안 도와준 후원회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지난 달 29일 사은음악회를 열었다. 행사는 오후 5시에 열렸다. 전례없이 이른 시간에 음악회가 열린데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르다. 대통령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 예정보다 1시간을 앞당겼다, 그게 아니라 오후 7시30분에 음악회가 한 차례 더 있어서 그랬다는 두 가지이다. 그 날 대통령은 오지 않았고 7시30분에 다른 음악회도 열리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VIP의 행차는 오히려 문화예술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지난 해 한국을 다녀간 로만 헤어초크 독일대통령은 조용히 문화행사에 참석했다. 4월에 방한할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은 조용히 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을 둘러보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지난 해 가을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회당에서 러시아의 키로프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렸을 때, 장쩌민(江澤民)주석은 일반청중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고 공연이 끝나자 어느 정도 청중이 나간 뒤 조용히 퇴장했다고 한다.
관의 문화참여가 민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관은 민의 활동을 순수한 자세로 지원해야 하며 관이 문화 위에 군림하려 하거나 문화인들을 시혜대상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민과 공(功)을 다투려 하지 말고, 문화예술행사는 예술인들이 주도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임철순 부국장겸 문화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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