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즈음 무척 반계 유형원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22세때인 1643년에 여주로 이사했고 32세때인 1653년에 부안(扶安)으로 이사하여 1673년에 5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부안에서는 소나무와 대나무 숲 사이에 초가집을 짓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주위가 조용해야 편안한 마음으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옛 어른의 말을 가슴에 새겨넣었던 것같다. 그렇게 살고 싶으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하고 지내다 보니 마음으로는 더욱 그가 그리워지는가 보다.
유형원은 시골에 살면서 오직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마음에 깨우치는 바가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일어나서 글을 쓰곤 하였다 한다. 그러고도 오히려 부족해서 매일 저녁마다 『오늘도 또 헛되이 지냈구나』하며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기분을 어느 정도는 알만도 하다.
그의 대표적 저술은 「수록」인데 31세때 시작하여 49세때인 1670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니, 18년이 걸린 셈이다. 「수록」은 정치·경제·군사 등 당시의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개혁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저술이 끝난지 꼭 100년, 세상을 떠난지 97년만인 1770년에야 「수록」은 겨우 출판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실학의 시조로 추앙하는 유형원도 1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세상의 인정을 받게된 셈이다. 학문이란 원래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늘의 사회가 당장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제공해주는 학문도 있어서 학자들이 정치가와 어울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미국에서는 흔히 그러하므로 나쁠 게 없다고들 한다. 나는 미국학계의 사정에 어두우므로 과연 미국의 학문을 상징하는 대표적 학자들도 그러고 있는지 어떤지를 모른다. 그러나 추측컨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서는 연구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는 정치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천하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정치가는 국가와 민족의 공적인 이익보다는 자기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부심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책에 확고한 기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되겠는지 모르지만 학문 분야에서 예를 든다면,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을 홀시하는 정책도 결국은 그 같은 사고방식의 결과일 것이다. 기초과학이나 인문학은 민족의 먼 장래를 위하여 필수적인 학문 분야이다. 이 학문의 뿌리가 깊어야 꽃도 좋고 열매도 많은 것이다. 이같이 뿌리를 무시하는 잘못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학자는 일정한 거리에서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유형원은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도리로써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사사로움에 인연하여 법을 제정하므로 사회가 문란하여졌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도리란 곧 원리·원칙인 것이며,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인간의 도리, 인간 사회를 꿰뚫고 있는 원리·원칙, 곧 진리를 강조하는 학문은 현실 사회가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사사로움에 치우침으로써 사회는 문란해지고 민족이 패망하게 된다는 경고를 할 책무를 또한 학문이 감당해야 한다.
유형원과 같은 학자가 그리운 때다. 유형원과 같이 일생동안 조용히 공부만 하다가 죽는 학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형원과 같이 도리의 중요성, 원리·원칙의 중요성,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 사회,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는 길이 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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