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나마 일본이 동아시아 경제의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자금협조 방안을 제시하는 등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이미 300억달러의 기금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기부양과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미야자와 이니셔티브」를 실행에 옮겨, 이중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37억달러를 투입하고 있다. 여기에다 동아시아지역의 사회간접투자 확충을 위해 50억달러를 추가적으로 부담할 것도 약속하고 있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의 필요성도 다시 거론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한·일간의 자유무역지대 설립마저 제안하고 있다.일본의 노력은 경제적 협력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서구식 자본주의는 아시아의 토양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지난날의 낡은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7년동안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동아시아의 환란을 불구경하듯 방관만하다가 아시아 발전모델의 종주국으로서의 체면과 자부심을 잃어버렸던 일본이 명예회복을 위한 재도전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이처럼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서구의 압력을 예상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줄곧 일본이 내부적인 제도개혁과 경기부양으로 아시아의 경제회복을 주도하여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막아야 한다는 압력의 강도를 높여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일본의 지도자들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특히 작년에 환란을 겪으면서 일본의 ASEAN 텃밭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변해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이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격으로 미국마저 중국에 가까워지면서 일본을 우회하여 비껴나가자 일본사람들이 다시 고립되고 있다는 그 특유의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고립의 위기감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미야자와 이니셔티브」와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리 경제대국이라 하더라도 아시아에서 중국과 정면으로 주도권 경쟁을 벌일 힘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중국의 영향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그 대답은 바로 동아시아 지역의 균형세력으로서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즉 미·중·일 3국간 새 협조체제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아시아의 경제·안보질서를 구축하여 경제대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일본의 전략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주변정지작업으로서 한·일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한·일 자유무역 제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일본이야 무엇을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아시아통화기금을 비롯하여 일본의 경제협력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유무역도 장기적으로 검토하는 여유와 신축성을 보이면 된다. 다만, 일본이 구상하고 있는 미·중·일 구도는 새로운 아시아 질서형성 과정에서 한국을 외곽으로 밀어낼 우려가 없지 않다.
물론 미국과의 군사적·경제적 관계를 고려할 때 쉽게 뒷전으로 밀려나지는 않겠으나 우리도 일본의 이니셔티브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략은 무엇보다도 다시 한 번 한·미 자유무역의 논의를 부활하여 미국과의 협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로는 미국이 우리의 제안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입장도 정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자유무역이 쉽게 성사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년 전과는 달리 금융시장마저 모두 개방한 지금에 미국과의 협상이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미국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별로 잃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중·일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질서형성에 적극 참여하여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는 우리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하기 위해 미국과의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철 朴英哲·고려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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