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올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실, 퇴, 도 등의 글자가 1년 내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수많은 근로자들이 정든 직장을, 금융기관과 기업은 신용을, 정부는 경제주권을 잃었다.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은 사람도 적지 않았고 사지 멀쩡한 가장이 가정을 포기하고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소득(연봉)도 많이 깎였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국제통화기금(IMF)체제전의 1만달러수준에서 올해에는 6,000달러수준으로 약40% 줄었다. 경제성장률도 마이너스 5~6%로 추락했다. 알짜배기 기업이 외국인의 손으로 대거 넘어갔다.
실업 실직 퇴출 부도 도산 삭감 감원 파산 추락 자살…. 그야말로 「실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기업이 재도약을 위한 경제개혁의 이름으로 쓰러져갔다. 공양미 삼백섬에 팔려가는 심청과도 같이….
일본의 한자능력검정협회는 매년 이맘때면 여론조사를 통해 일본사회의 한 해를 상징하는 한자 하나를 선정, 발표한다. 이 협회는 올해 「독」자를 선정했다. 일본사회를 극도로 긴장케 했던 일련의 독극물사건 때문이리라. 우리나라에서 「98년 한국」을 상징하는 한자를 하나 선택하는 여론조사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잃을 실(失)」자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98년 한국은 분명히 「실의 해」다. 미국의 유력 경제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은 29일 서울의 슈퍼마켓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돼지를 기르는 이재준씨(44·전남 나주)의 귀농사례를 소개하면서 그의 인생유전을 「슬프고도 갑작스런 운명의 변화」라고 표현했다.
올해 「슬프고도 갑작스런 운명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어디 이재준씨뿐이겠는가. 근로자(노조)에서부터 재벌총수(대기업), 공무원(정부기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구멍가게 주인 등 자영업자, 심지어 졸업을 앞둔 대학생에 이르까지 「슬프고도 갑작스런 운명의 변화」를 겪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의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이토록 큰 고통을 자초했느냐는 물음이다. 한 중견 경제학자의 고백이 의미심장하다. 『대학캠퍼스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어요. 「누가 선진국이 좋다고 했느냐」는 자조감이 팽배해 있습니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선진국이 되면 모두 피곤하다는 것이에요. 근로자는 언제 정리해고될지 모르고, 대학생들은 취직하기 어렵고, 부자들은 세금 많이 내야 하고, 정치인 관료들은 뇌물 못받아 고통스럽고….
IMF체제전이 가장 좋았다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개발독재시절의 비전은 선명하고 구체적이지 않았습니까. 조국근대화 정책이 성공하면 집집마다 자가용을 굴리고 컬러TV와 전화를 가질 수 있으며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갈 수 있다….결과적으로 맞았습니다. 지금은 뭡니까. 우리가 IMF체제를 극복하여 선진국이 되면 어떻게 된다는, 손에 잡히는 비전이 없습니다』
99년은 심청이 환생하는 「득의 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갈망이다. 가슴에 실자가 낙인된 사람들에게는 98년이 한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올해 「실의 경제학」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실은 득을 위한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득의 경제학」의 첫 수순은 떨어진 사기를 되살리고 파괴된 신용질서를 복원하는 일이다.
일자리 창출이니 외자유치니, 무역흑자확대니 하는 정책목표는 다음의 일이다. 효녀 심청이 공양미와 목숨을 바꾼 게 「실의 경제학」이라면, 심청의 환생은 「득의 경제학」이다. 정부당국은 환생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퇴행적 자조감이 더 번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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