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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하는 한국인(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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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하는 한국인(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9·끝)

입력
1998.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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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이주서 이젠 세계곳곳 ‘뿌리’/70년대 취업이민·국제결혼 등 러시/美 LA·뉴욕 등 ‘한인타운’ 정착/183개국 수교·기업해외지사 4,000여개/국제지위 따라 해외진출 눈부신 성장올해 10월 미국 중심부 뉴욕에서는 19회 코리언 퍼레이드가 성대히 펼쳐졌다. 이 자리에는 조지 파타키 뉴욕 주지사, 알폰소 다마토 상원의원 같은 거물급 정계 인사가 참석했다. 파타키 주지사는 이날을 「한국의 날」로 선포했다. 청과상의 85%, 세탁소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뉴욕 한인들의 세를 인정한 것이다.

92년 흑인폭동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LA는 서울시(市) LA구(區)라는 별칭으로 통한다. LA의 월스트리트라는 「월서 블리바드」는 한국 간판들이 빼곡하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 호텔, 쇼핑센터 등 점포가 즐비하다.

일제 강점기 만주, 러시아 등지로의 강제 이주에서 시작한 한민족 해외진출사는 눈물과 애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한인은 이제 세계 각국에 터전을 잡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고 세계 어디서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국은 현재 전세계 191개국 가운데 남·북한을 제외하고 183개국과 수교를 맺었고 모두 101개국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기업들의 국외진출도 활발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전 해외 지·상사의 수가 약 4,000여개에 달했다. 또 문화, 체육 등 각 방면에서 세계를 상대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다.

해방 직후 재외동포들은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해방후 50년사에서 대대적인 귀국붐은 이때와 해외유학생이 보따리를 싸 돌아올 수밖에 없는 최근의 IMF 시절 뿐이었다. 전쟁 복구에 힘을 쏟은 50년대와 5·16 군사쿠데타 등의 정치혼란이 이어진 60년대 까지만 해도 외국으로 눈길을 돌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국제결혼을 통한 이민자가 등장했고 연고자를 찾아 나서는 이민 행렬이 간간이 이어졌다.

해외진출이 본격화한 것은 70년대. 취업 이민과 국제 결혼이 러시를 이루었고 유학생까지 이 행렬에 동참했다. 70년대말 불어닥친 중동의 건설경기 특수로 기업들은 해외시장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디뎠다. 이어 노태우(盧泰愚)정권이 주도한 북방정책의 결과로 기업들은 구사회주의권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헝가리 폴란드 등 대기업들이 현지 공장을 차린 곳은 마치 국내의 대규모 공단과 흡사한 풍경이 됐다. 한때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던 베트남의 하노이시에도 한국 기업의 광고판이 내걸렸다.

한국은 현재 49년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시작으로(구한말인 1900년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한 적은 있음) IMF 등 유엔전문기구 16개에 가입했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 57년), 관세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67년) 등 3개의 유엔독립기구에 가입하는 등 꾸준히 국제사회의 문을 두드린 결과, 91년 남북한이 동시 유엔회원국으로 등록했다. 또 97년에는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임돼 국제적 역량도 과시했다.

국가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따라 한국인들의 명성도 높아가고 있다.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차장을 맡고 있는 김철수(金喆壽·57)씨는 95년 사무총장경선에서 강력한 후보였다. 유엔에서는 올해 5월 최영진(崔英鎭·50)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사무차장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기획지원담당 사무차장보에 취임했다. 미국에서는 한국계 2세인 고홍주(高洪柱·44)씨가 올해 10월 미국무부 인권차관보에 임명돼, 한국계로는 미국 정부내 최고위직을 맡았다. 특히 올해 세계 여자골프계의 혜성으로 떠오른 박세리(21)선수는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미 CNN방송을 장식하며 한국인의 자랑과 긍지로 소개됐다.<김정곤 기자>

◎해외 이민사/1903년 첫 하와이 이주/한일합방이후 러·일등 확대/60년대 광부·간호사 독일로/90년대 호주·加로 다양화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 선조들의 흔적은 20세기를 전후해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말 간도와 연해주, 만주 등지로 옮아간 조상들은 대부분 망국의 유랑민이거나 강제이주민들이었다.

공식적인 한인 이민사의 출발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시대부터. 19세기 말부터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사탕수수농장의 인력확보 차원에서 이민이 시작됐다. 미 농장주들과 정부각료의 로비에 따라 2년간 계속된 하와이 이민은 7,000여명. 1905년 멕시코의 「애니깽」농장도 이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애환의 장소다. 당시 해양업의 발달로 선박용 로프의 원료인 선인장의 일종 「애니깽」 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전단에 솔깃해 멕시코로 건너간 1,000여명의 한인들은 그러나 땡볕노동과 열악한 대우 등 참담한 생활을 겪게 된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만주와 러시아, 일본으로 대거 이주, 해방 전까지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달하는 400만명이 정치·경제적 동기로 해외로 나갔다.

62년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 이주했다. 70년대까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농장쪽으로 옮겨가던 이민사는 90년대에 이르러 수준높은 삶을 누리기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 캐나다 등으로 방향을 바꿨다. 다양한 나라로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한인의 최대 이민국은 미국. 최근 IMF의 여파로 칠레와 파라과이, 남아공 등에 대한 신청자가 점차 늘고 있는 것도 90년대말 이민사의 특징이다.<김지영 기자>

◎국제기구의 한인들/취업가능인원 2,500명/현재 근무인원은 193명/여성인력 등 수요 급증

유엔이나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에서 한국인이 취업 가능한 인원은 대략 2,500명이 넘지만 취업자는 10% 수준에 불과하다.

대표적 국제기구인 유엔사무국의 경우 총직원 1만 3,543명 가운데 한국인은 20명 뿐이다.

현재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은 193명. 앞으로 이 인원보다 10∼20배 정도 추가인력이 필요한 실정이다. 유엔사무국의 경우 고령직원이 많아 5년내 1,200여명의 직원이 퇴사할 예정이어서 그만큼 취업 기회가 늘어나게 된다.

특히 여성의 경우 국제기구 취업 전망은 「맑음」이다. 이 분야에서 여성인력의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유엔사무국의 한국인 직원 2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명이 여성인력이다.

유엔본부 및 전문 산하기구 등으로의 진출은 국가별로 배당되는 국별경쟁시험을 치르거나 공석 공고가 났을 때 개별시험을 통해 이뤄진다.

또 「국제기구초급전문가제도(JPO)」를 통해 직원이 될 수도 있다. JPO란 파견국 정부가 비용을 지불하고 현지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하는 제도.

인턴사원중 25% 미만이 정식 직원으로 채용된다. 정식 직원이 되면 연봉 3만5,000∼4만5,000달러, 10년정도의 경력자는 10만달러까지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9명이 JPO로 파견돼 활동중.<김지영 기자>

◎한국을 빛낸 인물/고홍주씨 美 국무부 인권차관보/김종훈씨 美서 10억弗규모 합병/윤이상씨 현대음악 새지평 열어/손정의씨 컴퓨터업계 제왕 부상

한국인, 한국계로 해외에서 한국의 자존심을 높인 인물들은 부지기수다. 세계 각국의 정치·경제·문화계에서 성가를 드높인 대표적 네 명을 소개한다.

『공부도 잘하고 부모도 존경하는 좋은 문화적 전통을 가진 한국계 젊은이들의 미래는 밝다』 올해 10월 미 국무부 인권차관보에 오른 한국계 2세 고홍주(高洪柱·44·미국명 헤럴드 고)씨의 말이다.

고씨는 우리말이 서툴러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한국을 지칭할 때는 우리말로 「우리나라」라고 꼭 표현한다. 예일대 인권센터 소장으로 쿠바, 아이티, 보스니아 난민들의 인권보호에 앞장서 온 그는 앞으로 세계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할 계획이다. 미 정부에는 고씨 이외에도 국장급을 포함 9명의 한국계가 포진하고 있다.

올해는 세계적으로 기업인수합병(M&A)가 가장 활발한 한 해였다. 이 가운데 CNN방송, 워싱턴포스트 등에 자세히 소개된 재외동포 김종훈(金鍾勳·37) 사장의 스토리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14세 때 부모를 따라 도미한 김씨는 92년 차세대 통신기술로 불리는 비동기식전송모드(ATM)방식의 교환기를 생산하는 네트워크장비 전문기업 유리시스템을 창업해 올해 4월 세계 최대 통신장비회사 미 루슨트테크놀로지와 10억달러의 합병을 성사시켜 주목을 받았다.

95년 이국만리 독일에서 망향의 한을 보듬고 숨을 거둔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씨는 현대음악의 거장이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친북인사」라는 낙인이 찍혀 생전에 조국땅을 밟지 못한 윤씨는 조국을 향한 염원으로 교향시 「광주여 영원하라」, 오페라 「심청」 등 모두 150곡의 작품을 남겼다. 동양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지평을 열었다는 윤씨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히고 있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재일동포 3세 손정의(孫正義·41) 회장은 빌 게이츠에 필적하는 컴퓨터업계의 제왕. 81년 소프트웨어 도매회사 소프트뱅크를 설립한 손회장은 세계적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과 손잡고 TV아사히의 최대주주가 됐으며 세계 최대의 컴퓨터 박람회 「컴덱스」의 운영권도 인수하는 등 공격적 경영으로 소문나 있다.<김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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