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씨 처음엔 “450억 통장 이게 전부”/수사 착수하자 연희동 ‘꼬리 자르기’ 전략/너무 ‘솔직한’ 李씨 핵심 이태진까지 거론/6공 비밀금고 실체 고스란히 드러나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금요일이었다. 95년 10월20일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는 가을체육행사로 텅 비었지만 수뇌부와 중수부장실이 있는 7,8층은 예외였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방안을 감돌았다.
『총장님, 박계동의원이 폭로한 계좌는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몇 단계 대책을 세우고는 있습니다만…』
안강민(安剛民·현 대검형사부장) 중수부장이 양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고 김기수(金起秀·변호사개업) 검찰총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김총장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먼저 관련자들을 출국금지 시킵시다』
수사착수 지시였다. 전날 밤 이홍구(李洪九)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대책회의에서도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오갔지만 검찰의 출국금지는 청와대와 협의를 거치지 않은 독자적인 조치였다.
김총장의 회고. 『물증이 있다고 폭로하는데 대통령이 부재 중이라고 검찰이 넋나간 듯 손 놓고 있을 수 있습니까. 누군가 판단을 하고 조치를 취해야죠.청와대와 상의는 없었지만 대통령이 있었더라도 결론은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연희동은 불안에 휩싸였다. 망연자실해 있던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대구에 있는 아들 재헌(載憲)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려울 때 가장 믿음직한 참모는 혈육이었다. 『재헌아. 네가 좀 올라와야겠다』
이날 밤 재헌씨가 황망히 연희동에 도착하자 노씨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에게 죄를 지었는데 잘하려다 보니 결과가 이렇게 됐다. 책임지고 모든 것을 국민에게 밝히겠다』
다음날인 21일 낮. 6공 참모들이 노씨 자택에 속속 도착했다. 서동권(徐東權) 전 안기부장 정해창(丁海昌) 전 비서실장 손주환(孫柱煥) 전 정무수석 김유후(金有厚) 전 사정수석등 3∼4년전만 해도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6공의 주역들이었다.
한 연희동 참모의 회고. 『우리는 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정치자금 받는거야 그때로선 별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고 5공때부터 돈관리는 경호실에서 다 한거 아닙니까. 각하와 이현우(李賢雨) 경호실장 두사람만 알고 있던 거였죠. 그런데 이실장이 우리 돈이 맞다고 하니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 아닙니까. 각하는 「미안하게 됐다」고만 하시지… 참 난감했어요』 또 다른 참모의 기억. 『대책회의의 결론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이상 연희동 자금으로 확인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거였어요. 결국 이실장이 자진출두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각하는 처음엔 「내 스스로 밝히겠다」고 했지만 주위에서 「그래서 될 일이 아니다」고 말렸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죠』
노씨는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씨)『이실장, 빨리 가서 그대로 말해라』
(이실장)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계좌 한개가 더있는데 그것도 가져가는게 어떻겠습니까』
(노씨) 『그렇게 하지』
따르릉∼. 일요일인 22일 아침 안중수부장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자택 전화벨이 울렸다. 연희동의 전령역할을 하던 김유후 변호사였다. 김변호사는 6공말기 사정수석을 거쳐 문민정부 출범직후 옷을 벗은 검찰출신. 안중수부장보다 검찰입문은 선배지만 경기고·서울법대 동기동창생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연희동 캠프에선 검찰을 직접 상대하기 보단 청와대와 조율을 하는 것이 편했지만 김수석은 「우리돈이 아니다」라는 연희동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이미 지리산 등반을 떠난 뒤였다.
(김변호사) 『급히 의논할게 있는데 바깥에서 좀 만납시다』
안중수부장의 회고. 『김변호사의 전화를 받고나서 「아, 이게 노전대통령의 돈이 맞구나」고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비자금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잠시 후 검찰청 인근의 팔레스호텔.
(김변호사) 『연희동 돈이 맞아요. 박계동의원이 말한 것을 포함해 한 450억원쯤 됩니다. 이현우실장을 검찰에 보내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안부장)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선 가능한 한 빨리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정말 450억원 뿐입니까. 나중에 더 나오면 문제가 꼬입니다』
두사람은 오후 2시로 출두시간을 정했다. 「아,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구나」 공안통인 안부장의 머리속에 앞으로 일어날 순탄찮은 상황들이 어지럽게 스쳐갔다. 안중수부장은 급히 김총장의 상도동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총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전화로는 애기할 수 없는 사안인데 직접 뵈어야 하겠습니다』
안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김총장은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모호텔로 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객실로 올라간 안중수부장은 김총장에게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김총장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안우만(安又萬) 법무장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등산을 가 부재 중이었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예정된 이씨의 출두시각도 1시간이상 늦춰졌다.
비슷한 시각, 대검 중수부. 김진태(金鎭太·현 서울고검검사) 검사는 나응찬(羅應燦) 신한은행장을 집앞에서 전격 연행해 온 상태였다. 김검사는 전날 밤 이우근(李祐根)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장등 은행관계자 3명을 조사,「전주(錢主)」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김검사의 회고. 『새벽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행장을 데려와 막 조사를 시작하려는 데 문영호(文永晧·현 홍성지청장)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위에서 나행장을 내보내란다는 거예요. 기껏 잡아 온 사람을 말도 못붙여보고 내 보내려니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치밀었죠』
청사로 나온 안중수부장이 수사팀을 소집했다. 안부장이 잔뜩 부어있는 김검사를 보고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 했다. 『김검사, 나행장을 그냥 보내 서운한가. 자, 준비하자구. 오후에 이현우 실장이 들어올거야』
오후 3시30분 정각. 이씨가 탄 검정색 그랜저 승용차가 대검청사앞으로 미끌어져 들어왔다.
기자들의 질문공세. 『300억원은 누구 돈입니까』
『내가 관리하던 돈입니다』
『노전대통령의 돈입니까』
『검찰에서 밝히겠습니다』
이씨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이씨 조사를 맡은 김검사 이야기. 『이실장은 통장 4개를 들고와서 그게 전부라고 했어요. 박계동씨가 폭로한 계좌 3개에 145억원짜리 통장하나가 더 붙은 거죠. 이실장은 참 답답한 사람이었어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라서 그런지…「이름이 뭡니까」 했더니 한 30분 있다가 「이현웁니다」하더군요. 다른 질문에도 마찬가지였어요. 할듯 말듯 애를 태우다 마지못해 한 마디씩 하더군요. 발언 요지는 비자금 450억원이 통치자금으로 쓰다 남은 것이고 더 이상 없다는 거였어요』
이실장의 출두는 연희동의 도마뱀 꼬리자르기 전략의 일환이었다. 검찰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미 드러난 신한은행 계좌를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자는 고육책인 것처럼 보였다』고 기억했다. 연희동측은 YS가 돌아오면 사태가 진정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희동 참모들은 지금도 『이실장의 출두로 모든 것이 끝난 게임이었다』며 『언론에 융단폭격을 당하는데 복선(伏線)을 깔 경황이 있었겠느냐』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11시간 반의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이씨는 새벽 3시께 풀려났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이실장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예금통장 얘기가 터져나왔다. 『145억원이 입금된 통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노전대통령이 직접 비자금을 조성했고 나는 단지 돈을 건네받아 은행에 예치했다가 노대통령이 원할때 인출해 갖다주는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이씨가 『있는대로 밝히라』고 했던 노전대통령의 지시를 너무 「솔직히」 수행했던 것일까. 이씨는 모든 책임을 노씨에게 돌리고 있었다. 더욱이 이씨는 핵심 실무책임자였던 경호실 이태진(李泰珍) 경리과장의 존재마저 털어놓고 말았다. 6공 비밀금고의 실체가 만천하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물론 검찰은 이씨의 진술을 다 믿고 있지 않았다. 검찰고위관계자의 회고. 『연희동에선 450억원이 전부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어요. 이미 동화은행장사건과 비자금 내사자료를 확보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었죠. 나중에 들은 얘긴데 김유후 변호사도 실제 노씨 돈이 얼마인지 정확히 몰랐다고 하더군요. 사과성명이 나올 때까지 노전대통령과 이현우씨 둘만이 알던 비밀이었던 거죠』 검찰은 10월24일 비자금의 열쇠를 쥔 이태진씨의 출두를 기점으로 전격적인 계좌추적에 돌입했다. 노씨와 연희동캠프는 점점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었다.<이태희 기자>이태희>
◎비자금수사 주역들/안강민문영호김진태 3인방/매일같이 TV등장 ‘스타’ 부상/목욕탕의 시민 사인요청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를 담당한 주역들은 일약 언론의 주목을 받는 「스타검사」로 떠올랐다.
수사사령탑이었던 안강민 중수부장과 주임검사였던 문영호 중수2과장, 노전대통령을 조사한 김진태 검사등 「수사 3인방」은 거의 매일 TV화면에 등장했다. 빈도수로 따지자면 인기 최절정의 탤런트보다 더 자주 얼굴을 내미는 편이었다. 물론 김기수 검찰총장도 수사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들은 모두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동향인 PK(부산·경남)검사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안우만(安又萬) 법무부장관에 이어 경남고출신인 배재욱(裵在昱)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들어서면서 사정분야에 완벽한 YS의 친정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안중수부장은 대검 중수부 2, 3과장,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거쳤지만 서울지검과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한 이력 때문에 공안통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정국을 읽는 눈과 특수수사 능력이 함께 필요했던 비자금 사건의 성격을 감안할 때 그의 중수부장 임명은 당시로서는 절묘한 인선이었던 셈이다.
안중수부장의 회고. 『사건이 터진 뒤 친한 친구가 내기를 하자고 하더군요. 노씨를 구속시키면 해달라는 대로 해 주겠다는 거예요. 나는 웃고 말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구속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대통령이라도 잘 못하면 구속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안중수부장의 선 굵은 얼굴은 연일 계속되는 언론사 속보경쟁 덕분에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안면이 알려지면서 생긴 일화 한토막.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 안중수부장이 동네 사우나탕에서 목욕을 하는데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다가왔다. 어이없어하는 안부장에게 그는 씩씩한 목소리로 사인을 요청했다. 『현역군인인데 휴가를 나왔다가 뵙게됐다』며 『앞으로 제대하면 대학에 복학할 예정』이라는 젊은이에게 안중수부장은 「인생을 바르게 살라」는 뜻에서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차가우면서도 이지적인 용모의 문영호 부장검사는 93년 대검 마약과장을 지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국제마약수사공조체제를 확립하는 등 초보단계에 있던 국내 마약수사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가 사건을 처음 맡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문부장의 회고. 『안중수부장이 처음 사건을 맡으라고 했을 때만해도 사건이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은 몰랐어요. 우리도 4,000억원설 파동도 있고해서 뭔가 있다는 정도는 알았지요. 하지만 몇백억 수준일거라고 짐작했어요. 사법처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죠』
김진태 검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특수수사통. 서울대 법대 졸업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 검찰에 들어온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시절 학보사 편집장을 맡는등 당시로선 「운동권」에 속해 있었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슬롯머신 사건때 엄삼탁(嚴三鐸) 전 안기부기조실장을 구속시킨 장본인이다. 안중수부장과 문부장이 검찰의 대표주자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면 김검사는 노태우·이현우씨는 물론 재벌총수들을 호령한 특별조사실의 스타였다.
김기수 총장은 비자금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95년 9월 인사에서 총장으로 전격발탁됐다. 서울지검장과 검찰국장등 요직을 거치지 않은 그의 발탁은 PK출신인 점이 고려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문민정부가 저물무렵인 97년 8월 퇴임한 뒤 변호사개업을 한 그의 사무실 한편에는 액자 하나가 걸려있다. 영국 인물정보센터에서 96∼97년 세계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는 인증서다. 재직기간 중 전직 대통령을 구속해 세계적으로 검찰을 빛냈다는 것이 선정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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