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두 여성시인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기묘한 우연이며, 어쩌면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영국 최고 여성시인의 한 명으로 꼽히는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는 종교적인 이유로 결혼을 단념하고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살았다. 세련된 시어와 분명한 운율, 온아한 정감이 흐르는 그의 시에는 중세적 분위기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의 시는 대체로 우울하면서도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느낌을 준다.■미국의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역시 독신으로 지냈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언니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무명시인으로 세상을 떴다. 몰래 쓴 그의 시는 생전에 7편밖에 발표되지 않았으나, 사후에 발견된 1,700여편은 그를 휘트먼과 같은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의 시 또한 청교도적인 경건성에 물들어 있다. 11일 타계한 여성작가 최명희씨 역시 결혼도 하지 않고 17년 동안 대하소설 「혼불」에 매달려 왔다.
■정성을 다해 큰 꽃 한송이를 피우듯이 장구한 시간을 「혼불」에 매달린 그의 글쓰기는 로세티나 디킨슨의 종교와 다르지 않다. 2년전 완간된 「혼불」(전10권)은 1930년대 전북 남원의 한 양반가문을 지켜가는 며느리 3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농민의 치열한 삶을 서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작가는 특히 호남지방의 관혼상제등에 대한 극사실적 묘사로 인간 심성의 바탕에 깔린 다양한 무늬를 그려 보이고 있다.
■대작을 하는 많은 작가들이 결과적으로 작품과 생명을 바꾸었듯이, 그도 「혼불」완성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소설의 6, 7부를 계속 쓰고 싶어 했지만 이 작품은 5부로 「완간」되었다. 완간될 무렵 작가에게는 이미 암의 촉수가 깊이 닿아 있었다. 그는 『이 작품이 인간의 본원적 고향으로 돌아가는 징검다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오늘(15일)은 모국어의 결을 유난히 사랑하던 작가가 이승의 고향인 전북 전주 덕진공원 내 최명희문학공원에서 「인간의 본원적 고향」으로 떠나가는, 슬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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