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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로 수뢰사건:상(문민정부 5년: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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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로 수뢰사건:상(문민정부 5년:66)

입력
1998.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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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 실장 축재추적”에 DJ “잘 해봐”/15대 총선 한달전 권노갑·오길록씨 일산 달려가 보고/張씨 필사적 무마로비에 6일당겨 전격폭로 與 “발칵”/YS 당일보고 받고 “張군 오라해”… 청와대 한때 ‘맞불’ 논의15대 총선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96년 3월 초 어느날 저녁. 김대중(金大中)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일산 자택에 총선사령탑인 권노갑(權魯甲) 선대위수석부의장과 오길록(吳佶錄) 부정선거신고센터부소장이 노란봉투를 들고 급히 들어갔다.

『총재님. 오소장이 한 건 했습니다. 청와대 장학로(張學魯) 실장이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권부의장이 먼저 운을 뗐다.

『장학로가 매일 기천만원씩 돈을 집으로 가져온답니다. 대통령은 칼국수 먹는다는데 확인해 보니 장실장 재산이 엄청납니다. 잘 조사해서 작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얼굴이 불그레 상기된 오부소장이 김총재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속에는 장실장과 동거녀 김미자(金美子)씨 일가의 재산내역을 담은 서류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서류를 뒤적이던 김총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실장이라…」

「장실장 카드」는 총선을 앞두고 여당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메가톤급 「폭탄」이었다. 이윽고 OK 사인이 떨어졌다. 『잘 해봐』

일산 김총재 자택을 나오면서 권부의장이 뒷단속을 했다. 『아주 좋은 자료야. 절대 보안이 지켜져야 돼. 꼭 성사시키라고』

일명 「J작전」. 국민회의의 총선용 「폭탄제조작업」이 은밀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났을까. 국민회의 박상규(朴尙奎) 부총재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청와대 장학로입니다. 가정문제로 전처가 그쪽(국민회의)에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봐 줄 수 있겠어요』

박부총재의 회고. 『장실장은 고향 후배여서 평소 형 아우하며 지냈죠. 오실장에게 물어봤더니 금전문제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내 힘이 미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벌써 한 달여간 조사를 했더라고요』

오길록 부소장의 기억. 『장씨가 권부의장등 당고위층에게도 구명로비를 했더군요. 하지만 권부의장은 「알았다, 알았어」하고 넘긴 모양이에요. 시국과 직결된 문제이고 총재에게까지 보고된 상황이었으니까요』(장씨는 그러나 권부의장에게 전화한 사실을 부인했다)

장씨의 구명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당초 「폭로 D데이」로 잡힌 날은 총선공고일 다음날인 3월27일. 그러나 장씨가 살기위해 「뛰는」 것을 눈치챈 국민회의는 3월21일로 일정을 앞당겼다.

오부소장의 이어지는 이야기. 『청와대에서 선수를 쳐서 장실장 사표를 받으면 큰 일 아니에요. 우린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셈이죠. 20일 오후 총재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바로 복사기를 돌렸어요』

21일 오전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 3층 기자실. 정희경(鄭喜卿) 선대위 공동의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발표문을 읽어내려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93년 2월25일 취임일부터 어느 누구에게서도 단 한푼의 돈을 받지 않고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누차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당은 김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하고 있는 장학로청와대제1부속실장에 대한 진정을 받고 조사한 결과 불법행위로 많은 축재를 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김대통령은 자기 혼자 깨끗하다고 큰 소리칠 것이 아니라 주변부터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마이크를 넘겨받은 오부소장은 장실장의 재산관계를 봇물처럼 쏟아내면서 한 손으론 현지에서 찍은 부동산 사진을 연신 흔들어댔다. 『장학로씨와 동거녀 김미자씨는 김대통령 취임직후부터 목동의 45평형 아파트와 다방등을 집중적으로 매입했습니다. 김씨는 이전에는 어느 주택도 소유한 사실이 없습니다. 김씨의 오빠는 경매와 위장전입등 전형적인 부동산 투기수법으로 경기 양평에 18억원대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동산과 부동산의 추계액이 37억원 상당으로 파악됐습니다. 또 장실장의 전처가 정신병원에 감금된 경위에도 의혹이 있습니다』

김대통령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렴」과 「도덕성」에 오점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문제를 제기한 측은 YS의 필생의 라이벌인 DJ였다.

당시 「DJ 부활」 저지와 총선승리에 대한 YS의 집념은 대단했다. 총선을 위해 개혁을 실종시켰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주돈식(朱燉植) 당시 청와대정무수석이 저서 「문민정부 1,200일」에서 밝힌 당시 상황. 『95년 6·27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기는 자만이 말할 권리가 있다」는 김대통령의 승자(勝者)철학이 어느 때보다 무게있게 들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후 「15대 총선에선 후보자 공천을 한사람씩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취임이후 김대중씨 측에서 몇차례 독대를 은근히 희망했지만 김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내가 몇차례 일산을 방문해 면담의 어려움을 암시했더니 김대중씨는 더 이상 면담의사를 전해 오지 않았다. 이를 전후해 느낄 수 있던 것은 3김씨간의 지칠줄 모르는 정적(政敵)의식이었다.

지방의회에서 이미 여소야대 상태가 발생했는데 국회에서 조차 야당이 정국을 끌고 가게한다는 것은 김대통령에게 참을 수 없는 치욕(恥辱)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개혁한다고 표가 오는 것은 아니다」는 식으로 개혁의 의미를 정리하고 정국은 제3의 방향으로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국민회의의 폭로는 총선정국을 강타했다. 신한국당은 혼란에 빠졌다. 총선승리를 목표로 신한국당에 긴급 수혈된 박찬종(朴燦鍾) 수도권대책위원장은 급히 보고를 받고 『이래가지고 선거를 어떻게 치르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

당시 청와대에선 국민회의의 이상기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장실장과 형제처럼 지냈던 김기수(金基洙) 대통령 수행실장의 회고. 『학로건이 터지는 줄 전혀 몰랐어요. 그때 청와대에 민주계라곤 나하고 이원종(李源宗) 정무수석밖에 없었는데 둘이 제일 늦게 알았어요. 학로가 조금만이라도 먼저 나나 이수석에게 이야기 했으면 어떻게든 손을 썼을 거에요. 학로가 국민회의의 폭로 전날인 20일 대통령에게 이실직고했다는 소리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학로는 대통령에게 죄스러워서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끙끙 앓은 거죠. 대통령은 폭로당일 민정수석실에서 보고를 받고 알았어요』

장학로씨 본인의 설명. 『국민회의에서 정치적으로 하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또 우리하고 (국민회의가) 관계가 괜찮았다면 모르지만 솔직히 그땐 냉전상태였잖아요. 따로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겠다 싶었어요.대통령께서 돈받지 말라고 몇번이나 이야기도 했고…』

YS는 민정수석실의 보고를 받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장군이 그럴리가 있나. 내가 어떻게 했는지 옆에서 다 보고 있었을 텐데. 어서 장군을 오라고 해』

하지만 장씨는 국민회의의 폭로사실을 알고 이날 아침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김실장등 몇몇에게 전화로 변명을 했다.

김실장의 이어지는 설명. 『학로는 「아무리 기억을 해도 내가 이권에 개입한 적이 없다. 별탈이야 있겠나」하더군요. 우리는 학로를 믿었어요.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했지요. 따지고 보면 학로는 정쟁의 희생양이었어요』

YS는 결국 「검찰 수사를 통한 신속한 진화(鎭火)만이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민정수석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장씨의 사표는 즉시 수리됐고 이날 오후 장씨에게「깨끗하다면 직접 들어가 해명하고 나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음날인 22일 아침 청와대 이원종 정무수석실.

『왜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우리도 터트립시다. 맞불을 놓자구요』

소장파 비서관 3∼4명이 격앙된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이야기. 『우리는 이회창(李會昌)씨가 폭로했던 것과 비슷한 DJ비자금 자료를 가지고 있었어요. 또 다른 인사들의 비리도 몇건 확보해 둔 게 있었구요. 하지만 이수석의 만류로 실행하진 못했어요. 이수석은 「과거에 공작정치에 시달려 온 우리가 똑같은 짓을 하면 되겠느냐.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학로가 책임지면 되지」라면서 강력히 반대했어요』

그러나 이 폭로사건 이후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간에는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박부총재의 회고. 『한나라당쪽에서 비자금 이야기가 들려 걱정들을 했지요. 하지만 총재님은 「나한테 그런 일 없다」며 당당했어요』

또다른 국민회의 간부의 이야기. 『원래 불난 집에서 「불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한국당에서 엄포를 놨지만 우린 자신있었어요. 당시 우리에겐 장실장건처럼 확실한 물증을 잡진 못했지만 청와대 비서관 3∼4명의 개인비리에 대한 구체적 첩보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의혹제기 차원이라면 충분한 수준의 정보였어요. 하지만 지나친 「네가티브(폭로)전략」은 오히려 비열한 인상을 줄 수 있어 그만두었죠. 미국의 깅그리치 하원의장도 클린턴 대통령을 너무 심하게 물고 늘어졌다가 오히려 물린 거잖아요. 마찬가지 경우죠』

김기수 실장의 회고. 『지금 생각하면 맞대응을 안하길 백번 잘했어요. 비록 총선에선 승리 했지만 우리는 그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어요. 특히 청와대에 있다 출마한 비서관들은 줄줄이 고배를 마실 수 밖에 없었어요』<이태희 기자>

◎YS와 장학로의 인연/張씨 대학시절 운동중 첫 만남/상도동서 잔심부름하다 청와대 동행

『이 시간부터 가족이외의 출입을 금지한다. 기자 비서 당원,친인척들도 모두 나가시오』

5·17 비상계엄으로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렇게 날을 세웠던 80년 5월20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상도동 자택에 한무더기의 군인들이 몰아닥쳤다. 이른바 가택연금조치. 군인들은 신속히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수행비서 홍인길(洪仁吉)씨와 장학로씨도 악을쓰며 버텼지만 군인들의 총검이 턱밑까지 와 있었다. 그때 서석재(徐錫宰)씨가 마당에 있던 군책임자에게 재빨리 달려갔다.

『저기 키 큰 사람(홍인길)은 총재 가족이고 저기 저 양반(장학로)은 이 집이 자기 집이오』 한참의 실랑이가 오가다 결국 이들 두명은 출입이 허용됐다.

「상도동 집사(執事)」장학로. 장씨는 20년간 상도동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YS의 손과 발 노릇을 해 온 가신(家臣)이다. 그의 주업무는 손님접대와 경조사 챙기기, 집안살림살이 관리, 잔심부름. YS가 5공초 가택연금­정계은퇴­단식투쟁등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암흑기를 보낼 때 주민등록까지 상도동으로 옮겨 그를 보좌했다. 김덕룡(金德龍) 문정수(文正秀) 서석재씨등 비서출신 가신들이 「머리」로서 YS를 보좌했다면 장씨는 「몸」과 「충성심」으로 YS를 받들어 온 것.

한 민주계인사의 이야기. 『YS가 출타할 때 넥타이를 골라주는 일은 장실장의 몫이었어요. 어른이 쌀쌀한 봄날에 조깅을 할 때 「머플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장실장이었어요. 어른의 수족과 같았지요』

장씨가 상도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중앙대 3학년 때인 71년 학교운동장에서 조깅과 축구를 하던 김영삼의원을 처음 만났다. 그는 이듬해YS의 지방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 지지자가 됐다. 대학졸업후 군에 입대했던 장씨는 무조건 상도동에 찾아간다.

장씨를 조사했던 검찰관계자의 이야기. 『당시 장씨는 취직도 안되고 건강도 좋지 않자 상도동에 찾아가 아무거나 시켜달라고 했답니다. 처음에는 구두닦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워낙 성실해 신임을 얻었던 거죠. 아마 대통령은 장씨가 자기에게 거짓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거에요. 그래서 검찰에도 장씨를 믿고 보낸 걸 겁니다』

그는 YS정권 출범과 함께 대통령의 관저생활을 챙기는 청와대 제1부속실장(1급)에 임명됐다. 기존 관료사회에서 가신그룹의 청와대 입성을 반대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가신들의 후원아래 「위인설관(爲人設官)」으로 자리를 만들었던 것.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던 김기수 수행실장의 회고. 『대통령께서는 처음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비서실 직원들도 몰랐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요. 오죽했으면 첫마디가 「기수야, 니 나 차한잔 안주나」였겠어요』

그러나 청와대에 들어간 민주계 가신들은 공식라인을 타고 온 관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됐다.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K씨의 기억. 『YS는 가신출신이 아니고는 마음을 열지 않았어요. 정치적 동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전문가와 고용인으로서의 공식적인 관계,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었죠. 때로는 가신들에게처럼 「누구야 누구야」하며 마음을 터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가신그룹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전문관료들과의 무덤덤한 관계는 YS의 한계였다. 장학로사건으로 제방에 구멍이 뚫리고 이후 한보사건으로 둑이 무너지면서 홍인길 총무수석과 아들인 현철(賢哲)씨마저 구속되자 YS가 무기력해진것도 가신정치의 한계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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