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사태로 인해 워싱턴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던 14일 오후 4시(현지시간). 휴일에도 불구하고 조 록하트 백악관 대변인이 기자실에 나타나 짤막한 발표문 한 장을 읽고는 질문도 받지 않고 사라졌다.『이라크 사태로 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에 참석치 않고 워싱턴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러나 한국 일본 등은 예정대로 방문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클린턴이 APEC에 참석한다고 확인했으나 전용기에 오르기 불과 한 시간 전에 이를 뒤집은 것이다. APEC 회원국들에 대한 사전통보는 물론 사후에도 유감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APEC 참석 이후 예정된 클린턴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대해서도 백악관측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대사관측은 TV를 통해 클린턴 대통령의 APEC 참석이 취소된 것을 알고 부랴부랴 백악관쪽에 문의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주말을 보내고 16일 오후 정례브리핑을 가진 록하트 대변인은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 일본을 방문하기를 희망한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우리 대사관측은 당황했다. 14일에는 『못간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했다가 15일에는 『방문 취소될 가능성이 70% 정도』, 16일에는 『방문할 것 같지만 못갈 가능성도 40% 있다』며 왔다갔다 했다.
이라크 사태가 미국의 최우선적 관심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백악관의 자세는 분명 통상적인 외교 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시아 경제위기의 처방을 찾기 위한 APEC 정상회의를 미국이 이처럼 홀대하는 것을 보고 벌써부터 회원국 사이에는 『APEC은 이제 유명무실해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 대해 성의있는 설명 없이 『아직 최종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고만 되뇌인 것은 아무래도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설사 예정대로 방문한다고 공식발표 해도 비행기 타기 한 시간 전에 또 다시 번복할 지 모르는 게 「슈퍼파워 미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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