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황태자 추락하다(문민정부 5년:62)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황태자 추락하다(문민정부 5년:62)

입력
1998.11.07 00:00
0 0

◎구속직전 박철언 “닭의 목 왜비트나”/유세장 방불 비장한 출두 “돈 안받았다” 강력부인 불구/검찰측 덕일씨 진술 증거보전 등 만반준비 ‘손님’ 맞이/朴 의원 “예정된 감옥간다” YS에 분노표현 메모 전달93년 5월21일 오후 4시55분 서울지검청사 정문. 검정색 그랜저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당 관계자 50여명의 함성에 파묻힌채 박철언(朴哲彦) 국민당 최고위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권이 한사람을 일시 짓밟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짓밟을 순 없을 겁니다』

박의원은 구속을 각오한 듯 매고있던 곤색 넥타이를 풀러 옆에 있던 같은 당 김동길(金東吉) 의원에게 전했다. 당원들의 구호로 검찰청사는 유세장을 방불케했다.

박의원은 잠시후 11층 특별조사실에서 홍준표(洪準杓) 검사와 마주 앉았다.

『홍검사님,내가 예산을 빼와 서울지검 건물을 지었는데 내가 여기서 조사를 받게 되는군요…누명을 벗겨주는 것도 검사의 일입니다. 홍검사가 YS의 정치사냥에 이용되고 있다고 국민들이 오해하고 있으니 이점 유의해야 할 겁니다』

『선배님, 잘 알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미 「손님」을 맞기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19일 소환된 정덕일(鄭德日)씨로부터 이미 자백을 받아낸 뒤 증거보전까지 해놓았다. 이날 작성된 덕일씨의 1차 진술조서중 일부. 『89년경 청담동 카페에서 홍성애(洪性愛)씨를 자주 만날 때 홍씨는 한창 날리던 박의원 이야기를 자주했어요. 정사장도 순경같은 말단과 놀지말고 이젠 힘있는 정치인과 교분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습니다. … 홍씨의 집에서 박의원을 만나 세무사찰을 중지시켜달라고 부탁했어요. 5억원이든 밤색 007가방을 열어 보여주며 「사조직 관리하시는데 쓰십시요」하고 말했어요』

덕일씨의 진술을 확보한 검찰은 박의원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수립에 들어갔다. 박의원이 들고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의 수는 4가지. 「1.정·홍씨를 모두 모른다 2.홍씨만 안다 3.돈은 안받았다 4.정치자금이다」

유창종(柳昌宗·현 의정부지청장) 강력부장의 기억. 『당시 우리는 돈을 모아 덕일씨에게 가져다 준 경리담당자와 운전기사까지 조사했어요. 예상시나리오를 만들어 각 단계별로 도상연습까지 확실히 마쳤죠. 문제는 정치자금으로 받았다고 말할 경우였어요. 정치자금은 수사 안하던 시대아닙니까. 박선배가 누굽니까. 머리가 비상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법률가 아닙니까. 만약 「받긴 받았는데 연말에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해 버리면 정치인으로서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고, 처벌은 웃기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밤새 고민할 수 밖에 없었어요』

다시 조사실. 송종의(宋宗義) 서울지검장을 비롯한 검찰간부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박의원의 한마디에 검찰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두시간 쯤 흘렀을까. 홍검사가 유 부장방으로 숨이 넘어갈 듯 뛰어왔다. 표정이 환했다.『부장님, 3번입니다. 돈받은 것만 부인해요』 방에 모여있던 강력부 검사들의 입에서 『와』하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됐다, 됐어. 우리가 이겼다. 그 바쁜 박선배가 대낮에 여염집에서 정덕일을 만나 고스톱을 쳤다고. 그건 자백이나 마찬가지야』 유부장의 목소리도 흥분에 들떠 있었다.

박의원의 1차 진술조서 내용중 일부.

(홍검사) 『홍성애씨를 알고 있지요』

(박의원) 『예 알고 있습니다』

(홍검사) 『정덕일은 아는가요』

(박의원) 『이번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다음 기억해보니 2∼3년 전에 평창동 홍씨 집에서 한번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홍검사) 『(정씨 조사기록을 보여주며)정덕일은 사정비서관에게 부탁해 세무사찰을 무마해 줄 것을 간청했다고 진술했는데 어떤가요』 (박의원) 『세무조사와 관련해 구체적인 부탁을 받은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생면부지인 사람이 어색한 자리에서 장관까지 지낸 저에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홍검사) 『정씨는 당시 헌수표등 5억원이든 007가방을 건네주었다는데요』

(박의원) 『공직자인 제가 서양 마피아영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돈가방을 열게하고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홍검사) 『홍성애씨가 방에 들어오니 정씨가 황급히 가방을 닫았고 일순간 분위기가 어색했다는데요』

(박의원) 『말도 안되는 삼류소설의 각본같은 이야기입니다』

(홍검사) 『홍성애가 왜 피의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계속할까요』

(박의원) 『그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홍씨는 정패밀리와 옛날부터 가까운 관계여서 허위진술하는 것으로 보이고 정씨 형제는 저를 희생양으로 삼아 신권력층에 영합하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씨가 돈을 가져왔다면 홍씨 집에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홍씨와 정덕일의 예금계좌를 확인해 진상을 규명해 주십시오』

박의원이 정치자금 주장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박의원 측근인사의 이야기. 『안받은 것을 어떻게 받았다고 합니까. 박의원은 결백을 밝히겠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검찰과 사법부에 정의로운 법관이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죠. 결과적으로 우리의 착각이었어요』

그러나 수사에 참여한 검찰간부의 기억은 다르다.『나중에 변호인단에 있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쪽에서도 논의가 있었다고 해요. 법정에서라도 정치자금 주장을 하고 무죄주장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는데 슬롯머신 업자의 돈이라서 포기했다고 하더군요. 당시엔 정씨 형제에게 돈을 받으면 이유불문하고 도둑놈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법적으론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박의원의 판단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이 흘러 박의원은 정치적으로 재기했고 이 사건은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졌으니까요』

다음날인 22일 박의원과 홍씨,덕일씨등 3명이 함께 조사실에 모였다. 3자대질. 홍씨는 흥분해 있었다. 수사관이 신문에 실린 박의원의 인터뷰기사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기사에는 홍여인이 돈을 가로챘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박의원의 발언이 실려있었다. 홍씨는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거세게 항의했다.

(홍씨) 『박의원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돈을 가져갔다고요』 (박의원) 『홍여사 이건 내인생이 달린 문제에요. 정확히 진술해 주세요』

(홍씨) 『그럼 내 인생은요?, 내인생은 어떻게 하라구요』

마침내 홍씨가 울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것은 박의원.

『홍검사,이 여자 좀 말려줘요.이 여자 도대체 왜이럽니까』

홍검사의 기억. 『대질조사는 홍씨의 독무대였어요. 검사인 저보다 더 박의원을 신랄하게 몰아붙였어요. 하지만 박의원과 정·홍씨의 주장은 예상처럼 평행선이었습니다』

박의원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검찰은 이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YS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수(金榮秀) 청와대민정수석의 기억. 『YS는 박의원에 대해 원칙론을 강조했어요. 법대로 하란 뜻이죠. 구속보고를 했더니 아무런 감정표현을 하지 않더군요. 「그런가」하는 정도였어요』

하지만 YS도 과거 정적(政敵)의 구속에 목석(木石)같았던 것만은 아닌 듯 싶다. 홍검사의 이야기. 『수사가 막바지에 왔을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YS가 유부장님과 주임검사를 격려해주고 싶다며 밤에 들어오라는 것이었어요. 비밀이 없는 세상에 오해를 살 것 같아 정중히 거절했어요. 야당출신 대통령다운 발상이었죠』

박의원의 구속영장은 22일 밤 10시10분 발부됐다. 영장발부전 황태순(黃泰舜) 보좌관이 홍검사의 허락을 얻어 특별조사실에서 박의원을 면회했다. 황비서관을 본 박의원은 『하,이놈아들이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 하면서 종이에 간단한 메모를 했다. 「언론인 여러분 감사합니다. 새벽이 왔다고 소리치면서 닭의 목은 왜 비트는지 모르겠습니다…」

YS에 대한 분노를 담은 4장분량의 또다른 메모들도 황보좌관에게 전달됐다. 「인민재판식 수사 보도­이미 유죄 확정된 듯­일시적 군중들 박수­ 임기후 시대적 과제를 어느정도 해결해 냈느냐­ 역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국민에게 봉사해야. 이제 각본에 예정된 감옥으로 가게될 것. 그동안 성원에 감사…」 구속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 박의원은 「정치인」이었다.

영장집행전 홍검사는 박의원에게 깜짝 놀랄 말을 전해줬다.

『박선배, 다음은 검찰 내부인사를 수사할 겁니다』<이태희 기자>

◎박철언씨 법정공방/‘물증없는 사건’ 팽팽한 대립/검찰측 “헌수표 추적 불가능”/변호인측 “진술조작 증거” 반박/홍여인 증인채택후 출국도 불씨로

박철언 의원의 공판정은 슬롯머신사건의 최후 격전지였다.

변호인단의 최대무기는 물증이 없다는 것. 변호인단은 이 사건을 「시체없는 살인사건」에 비유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왜 물증이 없었을까. 재판때나 5년후인 지금이나 양측의 주장에는 한치도 물러섬이 없다.

당시 수표추적을 담당했던 은진수(殷振洙) 검사의 이야기. 『정씨 형제는 세무조사를 우려해선지 장부를 만들지 않았어요. 수익금을 장부에 기재하지 않는 대신 수익금이 적다싶으면 사장을 의심해 갈아치우는 식이었죠. 돈을 빼낸 장부도 없고해서 천상 수표추적을 해야했는데 박의원에게 준 수표는 「헌수표」(시중에 유통되던 수표)여서 추적이 불가능했어요』

그러나 변호인단의 주장은 판이하다. 한 관계자의 말. 『정씨 형제가 다른 사람들은 1,000만원권 새수표를 척척 주면서 유독 박의원에게만 「헌수표」를 주었다는 것부터가 진술조작의 증거죠. 박의원에게는 헌수표 4,000여장과 꼬깃꼬깃한 1만원권 1,000여장을 주었다는 것인데 학부모가 촌지를 줄 때도 정성을 모아 빳빳한 신권으로 10장을 주지, 헌돈에 100원짜리 동전까지 넣어주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박의원이 「실세(實勢)」였을 때 정씨가 초면에 그랬다면 「따귀」 맞을 일이죠. 돈을 안받았는데 물증이 있겠습니까』

또 하나의 불씨는 유일한 목격자인 홍성애씨. 홍씨는 2차공판 증인으로 채택된 직후인 93년 7월13일 돌연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다. 변호인과 검찰은 서로 「상대방이 홍씨를 빼돌렸다」고 공격해댔다. 결국 재판장인 서울지법 김희태(金熙泰) 판사는 홍씨의 법정증언이 불가능해지자 결심을 강행했다. 변호인단은 『편파재판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낸 뒤 집단 퇴장했다. 흥분한 박의원의 지지자 수십명이 일어나 『이게 문민시대 재판이냐』며 소란을 피워 법정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검찰도 변호인단에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은검사는 당시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해 내사를 해왔는데 박의원이 여자 연예인들과 어울린 내용을 「압박용」으로 재판부에 제출한 것. 은검사의 이야기. 『박의원이 재판과정에서 공직자로서의 처신을 강조해 이를 반박했지요. 하지만 약점을 잡고 목을 조르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법정에선 슬쩍 언급하는 선에서 그쳤습니다』

이에 대한 박의원측의 설명. 『조사내용은 이런 저런 모임에서 연예인들과 술먹고 밥먹었다는 것이었어요. 박의원이 공인으로서 비난받을 내용은 전혀 없었죠. 검찰이 박의원을 흠집내기 위해 작전을 쓴 거였어요』

결심공판에서 홍검사가 제출한 논고문은 장장 54페이지. 홍검사는 논고문에서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오른 결과 밀랍날개가 녹아 추락하는 이카로스의 최후를 본다」며 박의원을 쏘아붙였고, 박의원은 『권력은 짧고 역사는 길다』는 말을 남기고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퇴정해버렸다.

93년 11월5일 1심선고공판. 김판사는 『홍여인의 법정증언이 이뤄지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다른 증거만으로도 실체판단에 부족함이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고 이는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정됐다. 박의원의 완패였다.

박의원은 지금도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박의원의 이야기. 『1심에선 변호인단이 집단퇴정했고 항소심에선 담당재판부가 결심을 10일 앞두고 전원교체됐어요. 대법원에선 검찰출신 대법관에게 배당됐습니다. 나의 재판은 법조사에 치욕적이고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 겁니다』

당시 다른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한 인사의 회고는 시사적이다. 『구치소에 접견을 갔다가 우연히 박의원을 보았어요. 내 손을 꼭 잡더니 「선배님, 진짜 억울합니다. 진실을 밝혀 주세요」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더군요. 법조인으로서 박씨라면 진실일 것이고, 정치인으로서 박의원이라면 「정치쇼」로 볼수 있는데 아무튼 맺힌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