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때까지’ 마셔야 하나가 되고/주량이 곧 능력으로 통하는 사회/그러나 심야영업 허용을 계기로 음주문화 자성론이 일고 있는데…술이 사람을 마셔버린다는 무절제한 음주습관, 한국인의 고질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유난히 술을 자주 마시고, 한번 마시면 고주망태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 집단적으로 잔을 돌리며 악착같이 남에게 술잔을 강요한다. 독주를 들이붓듯 즐기고, 해괴망칙한 음주방식으로 허세를 부리는 한국인들. 최근 심야영업 규제해제를 계기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술문화 자성론이 다시한번 일고 있다.
과소비추방운동본부와 시민연대회의 등 시민단체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초래한 주원인인 「정신적 해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뚤어진 술문화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며 대대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나섰다. 이들 시민단체들은 9월27일 건전 음주문화 정착을 위한 시민발대식을 가진데 이어 불법 퇴폐업소에 대한 시민고발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음주문화수칙도 마련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건전한 음주문화 정착을 위한 백만인 서명도 받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한국인의 손실비용은 95년 기준으로 13조8,396억원, GNP의 3.97%에 달한다. 무절제한 음주습관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폭력과 산업재해, 교통사고, 가족불화 등 다방면에 걸쳐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있다. 과소비추방운동본부 김동은차장은 『외국의 경우 음주문제는 일부 알코올 중독자에게 한정된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폭음과 비정상적 음주방식을 즐긴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량=남자의 도량」으로 여기는 술문화, 죽을 때까지 마셔야 「우리」가 된다는 권주문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폭탄주 뿐만 아니라 회오리주, 무지개주(이상 양주+맥주), 드라큐라주(포도주+양주) 등 갖은 술을 섞어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 마실때 희열을 느낄까. 회식이나 술자리에 빠지면 상사 눈밖에 난다고 여기고 술 실력을 업무능력의 척도로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술은 흔히 권위와 사회적 신분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직장상사가 주선하는 술자리에 빠지거나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거절하면 항명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상사와 맺는 친분은 직장생활 성공의 주요 변수로 인식되므로 술자리 자체가 하나의 강제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냉면그릇이나 커다란 대접에다 술을 부은뒤 신입생들이 순서대로 마시고 자기소개를 하게 하는 모습은 흔히 신학기 대학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어느 한 경찰조사에서 선배들은 구토용 비닐봉지까지 준비하여 신입생들이 자리를 뜨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학생들은 선배의 술 권유를 거절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고 이런 태도를 자신의 후배들에게 전수한다. 이 과정에서 선후배간의 우애를 확인하는 갖가지 기형적인 음주방식들이 나타나고 폭주나 비정상적 음주형태로 연결되는 것이다.
오도된 공동체문화 역시 과음을 조장한다. 직장에서 친목도모와 화합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는데 무조건적인 동조를 공동체문화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곳에 참석하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고 결례라는 생각을 은연중 갖게 된다. 그래서 2,3차 계속해서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소속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과음으로 인해 업무를 처리하는데 문제가 생겨도 술꾼인 직장 동료끼리 서로 감싸주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더욱이 96년 위스키 시장 증가율이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독주인 양주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술마시는 방법은 벌컥벌컥 들이키던 이른바 막걸리 습성에 머물러 있다. 과소비추방운동본부 관계자는 『과음은 자랑이 아니라 다음날 업무수행에 차질을 초래하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며 『이같은 자각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조직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술이 사회생활의 윤활유 구실을 맡고 있는 것도 부분적으로 인정이 된다. 그러나 술문화가 결과적으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돼온 것도 사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한태선박사는 『대접문화가 관행화하면서 과소비문제를 초래하거나 각종 청탁 등 부정부패가 확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같은 술문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중요한 정보교환과 사교활동이 이루어지는 술자리에의 참가를 어렵게 함으로써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술문화를 바로잡는 것이 우리나라에 만연된 정신적 해이를 치유하는 출발점이자 IMF극복의 기본 전제』라고 강조했다.<남대희 기자>남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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