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때가 이르다 때가 이르다 하더니, 언제까지나 그 때는 이르기만 할 것 같더니, 언젠가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인가, 그래서 이제 그 때가 되었는가, 일본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나라의 문이 마침내 열렸다.일본문화 개방의 불가피성과 예상되는 충격과 대응의 자세는 이미 되풀이 되풀이 논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사로운 일인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일이다.
일본문화와의 화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 역사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문화라는 것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했다. 문화가 얼마나 큰 바람이면 그동안 문의 빗장을 단단히 지르고 있었겠는가. 또 문화가 얼마나 큰 바람이면 결국 그 문이 열리고 말았겠는가.
새 정부는 집권후 처음 맞는 문화의 달에 일본문화를 풀어 문화분위기를 한껏 조성했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문화끼리의 경쟁을 알리는 큰 신호이기도 하다.
문화관광부는 이와 거의 동시에 「국민의 정부의 새 문화정책」이란 것을 발표했다. 「문화의 힘으로 제2의 건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화의 세기」를 맞으며 문화를 국가발전의 동인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문화의 날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열의를 보인 정부의 문화의지는 「문화의 세기」와 「제2의 건국」과 「국민의 정부」라는 구호의 연결만으로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니다. 「문화의 세기」를 여는 정부의 세기적 책무를 진실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이 기조로 삼아야 할 것은 문화의 민주화요 국민화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민주화가 이룩되었지만 아직도 가장 후진의 분야중의 하나가 문화다. 문화, 특히 예술 문화가 온 국민의 것이 아니다. 국민이 골고루 혜택을 받고 있지 않다. 문화적 빈부의 격차가 경제적 격차보다 심하다. 문화는 귀족주의로 남아있다. 문화적 소외계층이 많아 문화향수의 기회가 균등하지 않다.
그러나 문화향수의 기회만 균등하다고 해서 문화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 그 기회를 활용할 능력이 균등해야 평등한 것이다. 문화의 민주화는 전국민의 문화인화에 있다.
지금까지 문화의 국민화를 가장 저해하는 요인은 문화시설의 빈약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래서 아직 요원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웬만한 시단위마다 시민회관이 세워지는 등 상당한 노력이 기울여져 오고 있다. 이제 문화를 온 국민의 것이 되게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문화를 향수하는 능력의 심한 편차다.
물론 많은 문화공간의 건설로 새로운 문화 프로그램을 자꾸 제공하는 것은 국민들의 문화 향수능력 개발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러나 취미 없는 곳에 흥미도 없다. 흥미를 갖게 하자면 취미부터 길러야 한다.
취미는 환경이나 교육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문화교육, 특히 예능교육은 학교교육이 절대적이다. 새로운 세기의 문화국민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은 학교교육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화관광부가 내놓은 새 문화정책에는 「문화예술의 생활화를 위한 학교 예능교육의 확대 개선」이 포함되어 있으나 같은 무렵 교육부가 발표한 초중고교육 정상화 방안에는 아무 반영이 없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학급단위로 와서 현장학습을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1993년 프랑스의 자크 랑 문화부장관이 내놓은 새 문화정책은 학교에서의 예술교육 개선안이었다.
우리들의 기성세대는 불행하고 불쌍하다. 새 나라를 세워 일으키는동안 먹는 것도 배우는 것도 배부르지 못했다. 문화적 교양과 소양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 문맹(文盲) 아닌 문치(文痴)의 세대다. 이들을 이제라도 문화화해야 한다.
파리에는 시민을 위한 미술교실, 음악교실이 곳곳에 있다. 시에서 교양인을 위한 실기를 무료로 가르친다. 미술 실기는 누드 유화에 조각까지 하는 수준높은 것이다.
우리의 문화시설들은 프로그램을 못채워 비워둘 일이 아니다. 각종 문화학교의 무료강좌로 얼마든지 시민을 교육할 수 있다. 요즘 방황하는 많은 퇴직자와 실직자들에게는 안식의 교실도 될 것이다. TV같은 영상매체도 문화교육 마당을 열어야 한다.
한 나라의 문화는 국민의 향수능력만큼 커지는 것이다. 시민에 대한 문화교육으로 문화가 국민의 것이 될 때 창작활동의 활성화도 문화시설의 확충도 문화산업의 진흥도 부추겨지고 일본문화 등 외국문화와의 경쟁력도 든든해진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이 「국민의 정부」의 지표다. 민주주의와 문화가 병행하는 「국민의 문화」의 창달이 21세기의 과제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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