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늙은 한 할머니에게서 들은 사랑 이야기가 귓전을 맴돈다. 남의 아내가 된 처지에 어떻게 40년 전 사별한 남편 추도식에 참석할 용기가 났을까, 공식행사에서 죽은 남편 생각으로 그렇게 섧게 울 수 있을까. 인스턴트 사랑 시대를 잊게 해주는 이 러브 스토리는 중국의 대만 포격이 치열하던 58년 진먼다오(金門島) 취재중 순직한 한국일보 창간외신부장 최병우(崔秉宇) 기자 부인 김남희(金南姬) 여사의 얘기다.『나혼자 백발이 되어 전사관에 걸려있는 남편의 젊은 모습을 바라보며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말 최병우기자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한 김여사는 9월26일 진먼다오에서 열린 최부장 순직 40주기 추도식에 두 딸을 데리고 참석했던 일을 이렇게 보고했다. 극단적인 정의파 기자 최병우, 너무 철저했던 직업인으로서의 최병우를 존경한다는 말과 함께 최병우 기념사업을 하는 후배 언론인들에 대한 고마움도 표했다.
김여사는 40년전 꿈 얘기를 어젯밤 일처럼 생생히 들려주었다. 인도네시아 내전 취재를 마친 남편이 대만에 도착한 58년 9월 어느날의 꿈은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남편을 찾아내 달려가 불러보면 남이고, 또 다른 장면에서 발견해 허위허위 달려가 손을 잡아보면 모르는 얼굴이고…. 이 꿈을 꾼 날 남편은 부상한 몸으로 진민다오 상륙을 시도하다 외국기자 5명과 함께 실종됐다.
남편을 잃고 3년후 김여사는 한국 족보학의 권위자 와그너(전 하버드대 교수)박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연민이 사랑으로 변한 것일까. 남편과 절친했던 와그너 박사의 구혼을 받은 김여사는 오랜 번민 끝에 재혼을 해 지금 보스턴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한 후배 언론인이 짓궂게 물었다. 『지금 최병우와 와그너 박사의 구애를 동시에 받는다면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김여사는 주저없이 말했다. 『그야 물론 최병우지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