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종류 1,000개서 1만1,537개로/50년대 농어업·노동·행상이 대부분/70년대 대졸사무직·서비스업 급속 증가/80년대이후 컴퓨터 등 첨단직업 쏟아져「지게꾼에서 M&A전문가시대로」
정부수립당시 농사와 막노동을 빼면 변변한 직업이 없어 초라하기만했던 우리의 직업사전도 1만개 이상의 직업이 올라있을 만큼 풍족해졌다. 노동부가 국제분류기준에 따라 직업사전을 만든지 10년만에 개정판을 발간한 「95년 직업사전」에 오른 직업은 1만1,537개. 초판에 비해 1,086개가 추가됐다. 부정확한 통계이긴 하지만 50년전 직업종류가 1,000개도 넘지않는 것으로 조사된 것에 비하면 50년만에 10배이상 늘어난 셈이다.
직업의 종류는 경제발전에 힘입어 엄청나게 변했다. 보릿고개 세대를 향수에 젖게했던 가난하던 시절의 직업은 이제 TV연속극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지잉 지잉」 징소리를 울리며 달동네를 누비는 굴뚝청소부, 「딸랑 딸랑」 새벽잠을 깨우는 두부장수 종소리, 「철컥 철컥」 엿장수의 가위질, 「솥 때워, 냄비 때워」 땜장이의 텁텁한 목소리, 머리카락장사꾼, 지게꾼, 넝마주이…. 40·50년대는 이처럼 농·어업종사자가 아니면 누구나 직업란에 「노동」「행상」으로 적어야만 했다. 46년 당시 5인 이상 규모의 사업장노동자는 12만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96%는 단순작업공이었다. 물론 공무원, 은행원, 교사가 되는 행운을 누리는 이도 있었지만 교육받은 극소수에 한정됐고 그나마 공채를 통한 기회보다는 연줄에 의한 채용이 대부분이었다.
최근에는 컴퓨터및 첨단기술분야에서 웹디자이너, 밀레니엄버그해결전문가, 정보설계사, 컴퓨터게임디자이너, 인터넷전문가, 정보검색사, 반도체·인공지능·초전도·위성통신연구원, 비파괴전문가 등의 직업이 추가됐다. 막일꾼이나 소개하던 직업소개소는 근로자파견업, 헤드헌터 등으로 분화했고 입·출금만 담당하던 단순한 은행원이나 경리사무원도 증권분석사, 금융상품개발전문가, 손해사정인, 물류관리사, 투자상담사, 선물거래사, 국제무역사, 기업신용평가사 등으로 발전했다.
기성세대의 판·검사, 의사, 교수 등에 대한 선호는 여전하지만 10·20대들에게 직업에 대한 편견을 찾기는 힘들어졌다. 96년 음악전용케이블TV채널인 KMTV의 VJ(비디오자키)모집에는 서울법대생 등 서울대생만 25명이 응시하는 등 명문대졸업생만 100명 이상이 몰려 달라진 세태를 실감케 했다. 60년대 들어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공업·서비스업의 일자리가 늘긴했지만 농업의 절대적 비중은 여전히 높았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린 생산직근로자는 100만명을 넘지못했으며 그나마 고급기술과는 무관한 단순직종이었다.
70년대는 중화학공업진흥과 함께 재벌의 본격적인 성장이 이어지면서 사무·서비스업종에 새 직업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대졸인력의 많은 부분이 기업으로 흡수됐고 경제붐을 타고 평균임금의 10배 이상 버는 세무사,관세사, 무역사, 감정사, 공인회계사 등이 인기직업으로 부상하면서 의사, 변호사에 못지않는 고소득직업으로 분류됐다. 공업화와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은 공장근로자의 등장과 함께 70년대 풍경을 보여주는 이색직업도 탄생시켰다. 70년대 중반까지 시장상인들과 밤늦게 귀가하는 노동자들에게 연탄불을 피워주고 연탄값의 2배를 받는 연탄불 피워주기나 유원지에 놀러온 행락객들이 부르는 노래를 녹음해주고 들려주는 녹음기장사꾼 등이 한 예. 이밖에 가정집에 전화가 거의 없던 것에 착안, 아파트촌에 전화기 1대를 놓고 급한 연락을 전해주며 전보료의 절반값을 받던 「급한 소식 연락센터」, 중산층을 겨냥한 애완견교미업, 통행금지시간에 임박해 택시를 대신 잡아주고 수고비를 받는 차잡이도 당시 신문에 단골로 나오는 「이색직업」이었다.
이어 80년대 들어서는 직업변천의 흐름이 더욱 빨라져 컴퓨터분야와 첨단산업에서만 500개 이상의 새 직업이 쏟아졌으며 피부관리사, 운동관리사 등 중산층을 겨냥한 서비스업종의 직업이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고 있다.
◎노동운동 50년사/‘탄압對 저항’ 넘어 ‘노사정委’ 새章/해방후 활성화 한국전쟁5·16 거치며 퇴조/70년대 전태일 분신으로 노조결성 확산/80년대 중반이후 “노조민주화” 쟁의 봇물
IMF의 영향이 컸긴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 노사정위원회가 대통령직속 자문기구로 발족한 것은 탄압과 저항으로 점철됐던 노동운동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할 만하다. 일제시대에 민족운동으로 출발한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에 밀려 외면당하면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다.
형식적이나마 노사관계 및 노동행정의 기초가 되는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등 노동관계법이 처음 마련된 것은 해방후 8년이 지난 53년. 선언적 의미에 그치긴했지만 노동의 법적·제도적 틀이 처음 만들어진 셈이다. 노동법이 제정되기까지에는 해방직후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가 주도한 잇단 파업과 한국전쟁 당시 조선방직 여성노동자 6,000여명의 4개월 파업 등 기층 노동자들의 저항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해방과 함께 이념대립의 폐해를 드러내면서도 폭발적으로 고양됐던 노동운동은 정부수립 및 한국전쟁을 고비로 급격히 퇴조, 60년대말까지는 거의 침묵상태였다.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쟁의가 이따금 있긴했지만 일회성으로 그쳤고 교원노조운동등을 촉발한 4·19 혁명의 분위기 역시 5·16으로 일시에 끝났다. 5·16으로 등장한 군부가 노동계를 향해 던진 첫 포고령은 모든 노동조직의 해체와 쟁의행위 금지였다. 61년 8월에 새로 만들어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50년대의 대한노총과 마찬가지로 유명무실한 조직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때문에 70년대 초까지의 노동운동은 조직운동이 아닌 파월 한진노동자의 KAL빌딩 방화사건, 울산 현대조선소 폭동 등 즉흥적이면서도 폭력적인 형태로 일어났다. 70년 11월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전태일(全泰壹)씨의 분신자살이 대표적인 예. 한자투성이인 노동법전을 이해하지못해『나에게 대학생친구가 있었다면』이라고 안타까워했던 전씨의 분신은 대학생 등 지식인층의 관심을 노동문제로 돌리는 큰 전환점이 됐다.
70년대는 유신과 긴급조치로 모든 사회운동이 위기를 맞은 시기였지만 노동운동은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의 노조민주화운동 및 노조결성움직임 등으로 완만하나마 확산돼 왔다. 유신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촉매역할을 한 79년 8월 YH사의 여성노조원의 신민당사 파업도 이런 흐름의 하나였다.
유신체제가 붕괴된 뒤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서둘러 끝났고 신군부는 80년말 제3자 개입금지를 명문화하는 등 노동3권을 철저히 제한하는 쪽으로 노동법을 개정, 기존의 노동운동탄압의 고삐를 한층 강하게 죄었다. 80년대 중반이후에는 대학생들의 노동현장투신, 대규모사업장의 잇단 노조결성 및 노조민주화운동이 확산됐다. 이런 움직임들은 87년 7·8·9월의 노동자 대파업으로 나타났다. 노동쟁의가 봇물처럼 쏟아졌고 사무·금융·전문직 등 노조결성이 비제조업으로 확산되는 화이트칼라 노조운동이 이어지면서 제조업중심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90년대 들어서 노동자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노조가입률이 떨어지는 변화가 일어났지만 95년 20만명의 조합원을 둔 민주노총이 발족하는 등 노동운동의 조직적 틀은 한차원 높게 진행됐다.<이동국 기자>이동국>
◎정부수립후 10대 노동뉴스
51.12 조선방직 쟁의
53.3 노동법 제정
61.8 한국노총 출범
70.11 전태일 분신
79.8 Y·H사건
87.7·8·9 노동자대투쟁
89 전교조결성 및 대량 해직
95.11 민주노총 결성
96.12∼97.2 총파업
98.1 노사정위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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