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지난 주 일본 방문은 한·일관계에 하나의 단락을 지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일본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양국관계의 구축을 성과로 내세웠지만 그러고도 양국의 거리는 줄곧 가깝고도 먼 그대로여서 대한해협은 평안하지 않았다. 이번에 김대통령이 일거에 그 거리를 좁힌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줄다리기를 되풀이 해 온 양국간의 과거사를 일단 매듭짓고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선언한 것은 진일보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한·일관계사의 한 전기가 될 것이다.김대통령의 성과는 공동선언에 담긴 문자의 화미(華美)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그의 기본자세에 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경과한 이점도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도 그런 전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가지지 못했다. 국민정서라고도 하고 국민감정이라고도 하는 인력권에서 크게 탈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기상조」이던 일본문화의 개방을 확언하고 금기시되어 온 천황의 방한을 시사까지 한 것은 김대통령의 용단이었다. 금세기 들면서 시작된 한·일 양국의 악연과 그로 인한 우리 국민의 한분(恨憤)을 금세기를 마감하면서 접고 새로운 세기를 맞겠다는 의지는 큰 결단이다.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와 협력하겠다는 결의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난 것을 해방이라 했고 독립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의 침략보다 더 긴 기간을 지나면서도 일제의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왔다. 일제에 감정적으로 발목이 잡혀있는 동안은 진정한 해방도 독립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일관계는 과거청산이라는 난문제의 전형적인 케이스다. 그렇다고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은 한·일관계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다. 김대통령의 과거청산은 대외문제뿐 아니라 대내문제에서도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20세기는 전반이 나라를 잃은 반세기요 후반이 새로운 나라를 세운 반세기다. 망국 끝의 앙금과 함께 건국과정의 찌꺼기 등 침전물이 세기말에 하구(河口)처럼 쌓여있다. 대일관계의 과거청산이 제2의 광복운동이라면 현 정부가 벌이고 있는 제2의 건국운동은 이 또한 과거청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발전의 도상에서 파생된 모든 적폐와 비리의 대청소운동이기도 하고 국가발전의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과의 대화해운동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과거로부터의 자유」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1년의 연두교서에서 유명한 4가지의 자유를 제창했다.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에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보태졌다. 그 해 8월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수상간에 공동선언으로 발표된 대서양헌장에서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다시 확인되었다.
우리로서는 여기에 제5의 자유로서 과거로부터의 자유가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거울일뿐 족쇄가 아니다. 역사에 비추어 새로운 길을 나아가야지 역사에 끌려다니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과거로부터의 자유는 과거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서다. 20세기는 우리에게 부자유스러운 역사였고 동시에 역사로부터 부자유스러운 한세기였다. 과거가 부자유스러울 때 미래도 부자유스럽다. 대서양헌장을 선언한 그 처칠은 그 전해에 영국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싸움을 붙인다면 우리는 미래를 잃어버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우리정치의 심서(心緖)는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가 말하는 이집트주의에 가깝다. 이집트인들은 미라로 상징되듯이 과거를 잊지못한다. 이에 반대되는 것이 인도(印度)주의다. 영(0)을 발견한 인도인들은 과거를 쉽게 망각한다. 과거를 잊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종속되지 말자는 말이다. 추억은 아름답지만 불행한 역사의 추억주의는 나라의 건강을 해친다.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기만 하는 정치를 흘겨보는 눈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서기 2000년은 이제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과거를 들출 것은 들춘다 하더라도 시한을 두는 것이 좋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듯, 금세기의 것은 금세기의 것으로, 건국 과정의 것은 건국과정의 것으로 청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21세기 선언」은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천명하는 것이 그 전문(前文)이라야 할 것이다.<논설고문>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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