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진 밀항” 첩보에 새벽 호텔급습/서울지검 개혁수뇌 포진에 홍준표 “때왔다” 수사건의/수사망 점점 좁혀오자 정씨 청와대등에 구명로비/“비호세력 대라” 추궁에 정씨 “배후 좋아하네” 큰소리『잠깐 주목해 주세요. 재방송은 없습니다. 금일 오전 6시40분 서울 에메랄드호텔 414호실에서 정덕진(鄭德珍·58·전 서울희전관광호텔사장)을 연행, 현재 조사중입니다. 오늘 더이상의 브리핑은 없습니다』
93년 5월3일 오전 8시. 서울지검 유창종(柳昌宗·현 의정부지청장) 강력부장이 기자실 문을 빼곡이 열고 책을 읽듯 또박또박 내던진 몇마디가 아침공기를 갈랐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기자들이 황급히 전화기에 매달려 고함을 질러댔다.
『긴급입니다. 정덕진이가 들어왔답니다. 슬롯머신 대부 말이에요…』
서울지검 주변에는 이날부터 한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가실 줄 몰랐다.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洪準杓·현 한나라당의원) 검사. 그의 학창시절 별명은 「무계(無稽)」였다. 생각하는 것이 너무「황당하다」는 의미로 친구들이 지어준 것. 보름전인 4월16일 홍검사는 입회계장을 시켜 「조직폭력배 자금원 빠찡코업소 불법행위 집중단속」이라는 6쪽 자리 보도자료를 슬그머니 기자실에 보냈다. 당시 홍검사가 「정덕진」이라는 이름을 슬쩍 흘렸을 때만 해도 기자들은 반신반의했다. 90년 「범죄와의 전쟁」때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서방파 두목 김태촌(金泰村)을 잡아넣을 때도 「C1」이라는 코드명으로 불렸던 정덕진을 배후세력으로 파악, 사법처리하려했지만 그가 눈치채고 미국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실패했었다. 정덕진은 그만큼 정보력이 뛰어난데다 정·관계에 두터운 비호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거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평검사가 칼을 던지고 배후세력까지 치겠다고 공언했으니…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격이었다.
그러나 서울지검을 감싸는 개혁 분위기는 천둥 번개를 일으킬 기세였다. 3월에 부임한 송종의(宋宗義) 서울지검장은 「송도사」라는 별명처럼 검찰간부 중 깐깐하고 대가 세기로 유명했다. 신승남(愼承男·현 법무부 검찰국장) 3차장은 호남출신의 개혁지향적인 검사. 유강력부장은 전임지가 대검 마약과장으로 검찰내에서 손꼽히는 강력부의 베테랑이었다.
유부장검사의 회고.『부임하자 마자 검사들에게 수사아이템을 내라고 했더니 홍검사가 슬롯머신과 카지노를 써내 놀랐어요. 대검 강력부에 있으면서 정덕진 이름은 숱하게 들은 바 있지요. 홍검사는 「오랫동안 내사해 전임 검사장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수사건의를 했는데 안됐다. 이번 인사를 보고 드디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큰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봅시다」라고 하더군요』
유부장의 보고를 받은 송검사장은『아, 그거 한번 해보지 뭐. 내가 대검 강력부장할 때 그렇게 하려던 사건인데…』라며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냈다. 수사팀이 천군만마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홍검사의 계획은 출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수사보고를 받은 대검에서 2번이나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 홍검사는 국세청 특별조사반에 89년 10월∼90년 2월까지 실시된 정씨일가의 세무조사 자료를 요청했다. 국세청은 처음에는『자료가 폐기돼 없다』고 잡아떼었으나『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가겠다』는 홍검사의 위협에 일부자료를 내놓았다. 유부장의 기억.『당시 국세청 관계자들을 불러 127억원이나 추징했는데 왜 고발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니 「그정도 금액이면 고발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어요. 서울지검에는 당시 이보다 훨씬 액수가 적은 탈세사건도 고발이 돼 있었습니다. 홍검사말마따나 뭔가 있구나 하는「감(感)」이 확 잡히더군요』
4월 초 서울 강남의 S아파트. 검찰 수사망이 조여오는 것을 느낀 정씨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후원자인 모건설사 대표 J씨를 찾아갔다. J씨는 대선때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아 정치자금을 댔다는 소문이 나돌만큼 YS와 가까운 인물. 정씨는 J씨가 양아들처럼 지내는 안모씨를 통해 줄을 댔다.
『회장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검찰이 슬롯머신 업소들을 친다는데 뭔가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후 J씨의 전화연락을 받은 검찰간부 K씨와 청와대 모비서관이 급히 달려왔다. 소식을 전해들은 정씨는 비로소 안심을 했다.
홍검사의 회고.『90년 국세청에서 조사한 탈세혐의로 정덕진을 구속하겠다고 했더니 대검에서는 예전 일을 왜 문제삼느냐고 제동을 걸더군요. 정덕진의 로비구나 싶었죠. 유부장이「그럼 추가 범죄사실을 찾자」고 해 김태촌 수사기록을 가져오면 공갈방조로 엮을 수 있고 대출서류 조작등 혐의는 얼마든지 붙일 수 있다고 했어요. 그리곤 곧바로 보도자료를 돌려버렸죠.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선전포고를 하고 수사를 기정사실화했어요』
정씨에 대한 홍검사의 집념은 해묵은 것이었다. 홍검사의 회고.『90년 초께 우연히 회식자리에서 동료검사에게 정덕진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현금동원능력이 1위인데 검찰간부들과 20년 지기라서 칠 수 없다」고 해요. 옆에 있던 이모계장도 「대단한 친굽니다. 88년 여당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 엄청난 돈다발을 바쳤다는 소문이 있어요」하더군요. 이 때부터 슬롯머신을 알기위해 정씨 소유의 영등포회관에 부지런히 다녔어요』
홍검사는 광주지검으로 전출된 이후에도 내사를 계속했다. 휴일마다 빠징코업소를 「순례(巡禮)」하며 시상률과 키판의 구조등을 파악해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 됐다. 당시의 일화 한토막. 홍검사는 슬롯머신 업소에서 그간 300만원 가량을 잃었는데 수사에 착수하자「홍검사가 슬럿머신으로 3억원을 탕진하고 홧김에 수사를 하고 있다」는 음해성 역정보까지 나돌았다. 홍검사는 당시 슬럿머신업소에「떡밥」을 던져 놓았다. 환전한 10만원짜리 수표에 일부러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던 것. 훗날 이 수표들은 홍검사가 정씨형제의 비계좌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 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서초동 검찰청사와 청담동 에메랄드 호텔을 사이에 두고 홍검사와 정덕진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정씨는 자진출두 약속을 두번이나 어겼고 홍검사의 귀에 정씨의 해외밀항 첩보가 들어왔다. 작전개시. 홍검사는 유부장에게까지 비밀에 부친 채 5월 2일 새벽 무장 수사관들에게 지시, 에메랄드 호텔을 덮쳤다. 『정회장님, 서울지검에서 왔습니다』
내복바람의 정씨는 예상외로 저항을 하지 않았고 곧 연행돼 서울지검 12층 홍검사의 맞은편 방에 갇혔다. 이 사실은 즉시 상부에 보고됐다.
홍준표와 정덕진. 두사람의 기싸움이 시작됐다. 정씨는 녹녹치 않았다.
홍검사가 연행된 정씨의 지갑을 뒤지니 「이름 값」을 하듯 100만원권 수표 11장을 포함 1,400만원이 나왔지만 그뿐이었다. 정씨의 조소가 뒤따랐다. 『내가 그리 허술해 보이오. 문제될 것은 벌써 지갑에서 없앴지』
이어지는 정씨의 조롱.『홍검사 내가 검사들과 회식할 때는 말이야. 당신 같은 검사는 말석에 앉아 내 얼굴도 보지 못했어』
홍검사의 반격. 『정덕진씨,나는 당신을 평생동안 구치소에 묶어 둘수가 있소. 하지만 당신은 나의 목표가 아니오. 당신은 「죽을」 고비를 3번 넘겼소. 88년 호청련사건으로 대검에서 내사 받을 때, 89년 안기부 내사때, 그리고 90년 10월 청와대가 주도한 세무조사에서도 포탈세액만 내고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소. 당신의 비호세력, 그들이 나의 목표요. 당신이 입을 열면 장기수는 되지 않도록 배려하겠소』
홍검사가 백지를 정씨에게 던졌다. 정씨가 백지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정씨와 중고교 동창생인 판사출신 법조인 A씨의 이름이 달랑 적혀 있었다. 법조인이면 누가봐도 알만한 사이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는 계산을 한 것이었다.
탈세 혐의에 대한 정식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세청에서 받은 자료가 있으니 서로간에 실랑이 할 필요가 없었다. 정씨는 이틀뒤인 4일밤 서울구치소에 조세포탈과 공갈방조혐의로 구속수감됐다. 구속 직전 정씨는 기자들에게 지갑속에 둔 네 딸의 사진을 흔들며 소리쳤다. 『딸들을 걸고 말합니다. 나는 죄가 없어요』
정씨는 홍검사를 매섭게 노려봤다.
『배후세력 좋아하네. 거꾸로 매달아도 불지 않을 거요』<이태희 기자>이태희>
◎홍준표의 인생유전/부친 누명에 “검사 되겠다”/4전5기끝 82년 사시합격/수뇌부와 잦은 갈등/‘통제불능 검사’ 낙인찍혀/좌천 뒤에도 폭력배 소탕
슬롯머신 사건을 만든 1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홍준표 검사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 검사의 모델이기도 했던 홍검사의 인생유전도 한편의 드라마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상명하복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검사상(像)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특수부검사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89년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근무할 때 맡았던 노량진수산시장 사건. 배짱있는 검사로 소문났던 그에게 5공비리 수사의 일환인 노량진수산시장 사건이 배당됐다. 홍검사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형 전기환(全基煥)씨의 시장경영권 강탈혐의를 수사하다 사건을 축소하려던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자 슬쩍 언론에 사건의 전모를 흘려버렸다. 언론을 이용한 특유의 공개수사 기법에 눈을 뜬 것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혀 광주지검으로 좌천된다. 인생은 새옹지마. 홍검사는 광주에서도 건설폭력배들을 일망타진하고 광주 전남지역 건설업자인 여운환(呂運桓)씨를 폭력조직「국제PJ파」의 실질적 두목으로 기소했다. 지역여론을 등에 업은 여씨를 수사할 때도 일본 야쿠자와의 결연식 비디오테이프를 중앙언론에 흘려 「응원군」을 만들었다.
그는 1954년 경남 창녕에서 빈한한 소작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형제중 공부를 가장 잘했던 그는 가족의 미래를 짊어질 「대표선수」로 뽑혀 형제들중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었다. 대구 영남중·고를 나온 그는 도시락을 쌀 수 없어 6년간 점심을 수돗물로 때우다시피했다. 누나와 여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의 방직공장에 취직해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장래희망은 육사를 졸업한 뒤 장군이 되는 것. 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71년 육사시험에 합격했으나 법대로 진로를 바꿔 고려대에 진학했다.
홍검사의 회고. 『당시 아버지가 비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파출소에서 이틀간 곤욕을 치렀어요. 아버지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경찰은 힘있는 유지편에 서서 아버지에게 덮어 씌우려 했죠. 유지가 추진하는 마을일에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났는데 나중에야 유지가 문제의 비료를 횡령했던 것이 밝혀졌어요. 그때 정치권력을 단죄하는 검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궁핍한 살림탓에 대학시절 내내 누런양말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그였지만 강한 소신에 언변이 능했고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4전5기끝에 82년 사시에 합격한 그는 검사임용에서도 끝에서 두번째 성적으로 턱걸이했다. 그러나 검사의 실력은 성적순이 아닌 법.
85년 봉천동 산마루 셋방을 나와 첫 부임지인 청주로 간 홍검사는 출발부터 「사고」를 쳤다. 검사생활 2년차인 87년 5월 법무부장관 처가쪽에서 경영하는 회사 회장을 검사장 결재도 없이 구속해 버린 것. 당시 피의자인 모회장이 『홍검사, 곧 인사가 있을텐데 서울로 가고 싶지 않나.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야』라고 겁을 준데 격분, 구속영장을 신청했던 것이다.
검찰을 떠나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홍씨의 검찰내부평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일부에선 「언론플레이에 능하고 안하무인식 공명심에 들뜬 검사」라고 폄하하지만 「모난 점은 있지만 정치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수사검사의 귀감」이라는 평도 있다. 언론을 이용한 「홍준표스타일」을 비판적으로 보는 검사들은 많지만 「슬롯머신 사건은 홍준표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는 대부분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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