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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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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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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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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입’ 오명 씻고 제2창군/한국·월남전 거치며 69만병력 양적 성장/5·16 12·12쿠데타로 군부통치 오점도/이젠 ‘작지만 강한군대’ 질적 도약 박차『새시대를 맞아 의식과 발상의 대전환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군대, 항상 전쟁터에 있는 정신력으로 오직 전선만을 바라보는 군대, 혈세를 낭비하지 않는 효율적 군대, 21세기에 맞는 정보·과학군을 정립해야 합니다』 2월말 천용택(千容宅) 국방부장관의 취임사에는 건군50주년을 맞아 「제2의 창군」을 위한 지향점이 분명하게 함축돼 있다.

국군은 48년 9월5일 국방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고 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됨으로써 본격적인 3군체제가 갖추어졌다. 일본이 남겨놓은 낡은 소총에 100톤급 증기선 1척, 경비행기 30대 등이 장비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한국전쟁(50년)과 월남전파병(64년)을 겪으며 성장을 거듭한 우리 군은 현재 병력 69만여명을 보유, 규모면에서는 중국 러시아 미국 인도 북한에 이은 세계 6위의 군사대국으로 발돋음했다.

창군 2년만에 터진 동족상잔의 전쟁 속에서 소총과 맨주먹으로 조국을 지켜낸 군은 이후 국방 뿐 아니라 사회 전분야의 근대화를 이끌며 국가발전에 큰 공헌을 해왔다.

우선 군은 사회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냈다. 창군이래 군문을 거쳐간 1,500여만명의 젊은이들은 군에서 투철한 안보의식과 함께 근대적인 시민정신도 배웠다. 50년대말에는 전체병력의 약 20%가 군에서 한글을 깨우쳤고 60년대엔 연평균 1만여명이 중학교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저학력자를 징집대상에서 제외시킨 70년대 초반까지 100만명이 군에서 문맹을 극복했다. 또 사회전반에 근대화·산업화가 진척되는 60년대말부터 기계 통신 전기 전자등 모두 110개 분야에서 200만명이 국가기술자격증 등을 취득하는 등 경제부흥을 이끈 기술인력도 배출됐다.

참전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64년부터 73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한 장병들이 벌어들인 22억달러는 이후 경제발전의 기본자산이 됐다. 경부고속도로 난공사구간을 비롯, 장병들의 땀으로 도로 6,000여㎞, 교량 676개가 건설되는 등 군의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공헌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가장 방대하고 선진화한 조직이었던 군은 5·16과 12·12군사쿠데타등 두차례의 탈법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씻지못할 오류를 범했다. 61년부터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설때까지 30여년동안 군부는 정치지도자를 배출하고 묵시적으로 정권을 뒷받침하면서 강력한 통치실세로 군림해왔다. 정권의 위기때마다 계엄군으로 민주화요구를 탄압했고 특히 5·18광주민주화항쟁때는 숱한 시민의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저항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군부통치의 장기화는 한국정치체제의 권위주의적 속성을 고착화시켰다. 군사문화에 의해 대화정치는 전투정치로 대체됐고, 권위주의적 밀실 관료행태는 전반적인 사회부패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양적 팽창에 주력해온 군은 이제 건군50주년을 맞아 질적인 변화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의 위험성을 감안해도 국가규모에 비해 과대성장한 군은 이제 규모와 형태, 역할에 대해 스스로의 진지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역시 막대한 인적·물적자원을 사용하는 군에게 「작지만 강한군대」를 주문하고 있다. 군은 이제 미군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정보수집능력을 시급히 증강해야 하고, 육군 보병중심의 재래군을 육·해·공 3군의 전력이 균형을 이루는 입체적인 전략군으로 전환해야 한다. 무엇보다 군 본연의 국방임무에 충실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랑받는 군으로 거듭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함은 물론이다.<정덕상 기자>

◎무기체계 변천사/육군­74년 M16보급 79년 ‘현무’ 미사일 개발/해군­63년 구축함 90년대에 잠수함 실전배치/공군­68년 F­4팬텀기 도입 현재 KF16 생산

율곡사업은 군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71년 미7사단이 철수한데 자극받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최초의 자주전력증강계획인 「국방 8개년계획」이 74년 착수됐다. 암호명은 「율곡사업」. 96년까지 23년간 무려 34조원이 투자된 율곡사업으로 군은 양과 질에서 창군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도약했다.

육군은 창군당시 일제및 미제소총, 박격포등이 고작이었고 국산장비는 하나도 없었다. 미군이 원조한 M­1은 너무 길어 어깨에 매면 끌릴 정도였다.

월남전을 거치면서 도입한 M16소총이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 개량돼 보급된 것은 74년. M16도 보다 편리하고 명중률이 향상된 순수국산 K계열소총까지 진전됐다. 80년대초에는 이동중에도 사격이 가능하고 산악지형에 적합한 국산 K1전차(88전차)가 개발돼 대체되고 있다. 장사정거리포의 국산화도 크게 진전됐으며 특히 다련장로켓은 17초에 36발을 발사, 축구장 하나 크기를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첨단무기이다. 79년에는 사정거리 180㎞의 「현무」가 개발돼 우리나라도 본격적인 「미사일시대」를 열었다.

공군의 무기발전상은 특히 괄목할만하다.

48년 L­4연습기 30대에 불과했고 50년에는 국민헌금으로 이른바 「건국기」로 명명됐던 고급연습기 T6기 10대가 캐나다로부터 들어왔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공군은 미군에게서 F­51전폭기 10대를 인수받아 큰 전과를 올리는 한편, 55년 F­86F 5대가 도입되면서 대망의 제트전투기시대를 열었다. 68년 1·21사태등으로 긴장이 고조되자 F­4팬텀기를 도입, 미국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 4번째로 팬텀기 보유국으로 등장했다. 전자장치에 의한 폭격 및 요격기능을 갖춘 전폭기로 초음속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90년대들어 공군은 미국의 F16을 기술도입, 성능을 개량한 KF16를 생산, 내년까지 120대가 완전 실전배치돼 북한의 항공전력을 압도하게 됐다.

해군도 돛단배 수준에서 미국 일본등과 함께 합동작전을 수행할 만큼 발전했다. 100톤급 2척과 40톤 1척이 고작이던 해군은 46년 7월 300톤급 철선인「충무공정」을 자체기술로 건조했다. 그러나 무장상태는 고작 소총이 전부였다. 49년 10월 미국으로부터 구잠함 1척을 구입하고 50년에는 해군장병들의 모금운동으로 PC­701(백두산함) 1척을 구입, 비로소 해상포를 갖춘 전투함을 보유하게 됐다. 63년에는 미군으로부터 3,000톤급 구축함을 도입하면서 해군의 면모는 일신됐다.

80년대 들어 사정거리 140㎞의 하푼 및 엑소세미사일등이 탑재된 한국형구축함을 실전배치한데 이어 호위전투함도 국산화했으며 90년대들어 잠수함 6척과 대잠초계기 P3C기가 실전배치돼 명실상부한 해상 해중 공중등 입체작전이 가능하게 됐다.<정덕상 기자>

◎군인복지 어떻게 달라졌나/70년대중반까지 콩나물국 단골/76년부터 1식3찬 자율급식제/화랑담배→백자→88라이트로/이등병 봉급 63년 130원 現 9,600원

창군이후 70년대중반까지 군생활의 가장 큰 고통은 힘든 훈련이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였다. 애초부터 보급량도 부족한데다 누수도 많았다. 쌀이 20%밖에 들어있지 않은 보리밥은 항상 턱없이 모자랐고 반찬이 따로 없어 국에 밥을 말아 먹는게 고작이었다. 『콩나물 숫자로 군번을 따진다』는 말이 생길 만큼 콩나물국이 그 시절의 대표적 메뉴였고 명절에만 나오는 고깃국엔 고기는 없이 기름만 둥둥 떠다녔다. 전쟁을 치르면서 병력은 급증했으나 정부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장병들이 산에서 땔감을 만들어 내다파는 「후생사업」과 영농사업을 해야만 굶지 않을 수 있었다.

76년부터 「1식3찬」에다 자율급식제가 시행되면서 장병식사가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요즘에는 신세대 기호에 맞춰 자장면 냉면 카레라이스 돈가스 생선가스 등이 식탁에 오른다. 「1식4찬」에 우유 사과·오렌지주스 아이스크림 등까지 후식으로 지급돼 『배고파서 군생활 못하겠다』는 말은 전설이 됐다.

배고팠던 시절, 그래도 보리밥을 먹고 한대 피워물던 「화랑」담배는 꿀맛이었다. 하루 지급량인 10개피로 모자라 버려진 꽁초만 봐도 주워모았고 담배를 안피우는 후배는 고참들에게 상종가의 인기를 누렸다. 81년까지 지급되던 화랑담배는 이후 「은하수」 「한산도」를 거쳐 89년엔 「백자」, 90년부터는 시중가 900원인 「88라이트」로 바뀌었다.

창군초기 병영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깨진 유리창을 모포로 막아놓고 한겨울을 지냈다. 흙벽돌의 내부벽은 신문지 시멘트포대로 도배를 했고 커튼은 밀가루 포대로 대신했다. 한겨울 분탄과 진흙을 반죽해 연료로 때는 페치카 당번병 「빼당」은 모든 일과에서 열외돼 전우의 잠자리를 덥혔다. 기름보일러가 모두 보급된 건물에서 아늑한 병영생활을 누리는 신세대장병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병영생활이었다.

사병의 봉급은 주식으로 지급되다가 63년 군인보수법이 마련되면서 이등병에게 130원을 현금으로 지급, 매년 20­40%인상돼 74년 1,040원으로, 88년에는 5,500원, 지금은 9,600원까지 올랐다. 그러나 사병의 봉급은 쌀값으로 환산하면 여전히 창군 당시와 비슷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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