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헌법·非核3원칙 50여년간 지켜지는건 건전 호헌파·여론 때문/일부 ‘망언’ 감정대응보다 내부의 큰흐름 주시를47년 시행된 일본의 이른바 「평화 헌법」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국민주권」 「민주주의」 「기본적 인권」 「언론 자유」 등은 전시 군국주의 체제에 시달려 온 일본 국민들에게는 눈부신 것이었다. 제9조의 「전쟁 포기」 「교전권 부인」 「전력 불(不)유지」 규정도 전쟁에 치를 떤 국민 감정에 들어 맞았다. 그러나 냉전에 따른 미국의 점령정책 변화로 패전 직후의 이런 공감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예에서 보듯 미국의 반공우선 정책으로 전시 지도자들이 속속 복권, 사회 지도층의 자리에 올랐다. 일본 국내의 「역사 청산」은 이렇게 불완전한 것으로 매듭됐다.
살아 남은 「전쟁 세력」과 그 계승자인 보수파 지도자들이 주도한 헌법의 확대 해석으로 「평화 헌법」의 이념은 조금씩 퇴색해 왔다. 자민당 내부가 개헌·호헌파로 나뉘어 호헌파가 다수인 야당과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50여년간 「평화 헌법」은 단 한 자도 고쳐지지 않았다. 일부 보수파 지도자들은 군대 보유까지 주장하고 있으나 적어도 헌법 9조의 손질은 국민적금기로 남아 있다. 「군대 보유」에 대한 아사히(朝日)신문의 여론조사 결과 55년 당시 「찬성 37%, 반대 42%」이던 것이 최근에는 「찬성 13%, 반대 81%」로 격차가 벌어졌다. 「군사대국화」는 단단한 여론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비핵 3원칙」으로 국제적인 반핵 여론을 주도한 것도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공이라기보다는 「풀뿌리」의 힘이다. 확고하게 정착된 지방자치제는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판단에 국가 운명이 흔들리는 것을 막고 있다. 지난해 교토(京都)회의에서 확인된 지구환경 보전 노력, 대인지뢰금지 노력 등 지구규모의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발언권도 시민단체의 힘에서 나왔다.
한편 일본의 정부개발원조(ODA)는 97년 94억여달러에 이르러 7년 연속 세계 정상을 차지했다. ODA는 시장개발과 확보라는 국가 전략에서 나온 것이지만 개도국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한국은 일본의 이런 모습을 좀체로 눈여기지 않았다. 양국간의 역사 청산이 매듭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지도급 인사의 잇단 「망언」이 우리 감정을 자극한 것이 큰 요인이었다. 「망언」에 가려 변화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은 정치지도자 한 사람에게 눈길을 빼앗기는 한국적 관행의 확대적용이기도 했다.
교과서의 군대위안부 기술 등 일본의 변화는 결코 한국·중국의 요구에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굴복한 결과가 아니다. 보수파의 끈질긴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대 변화에 따라 일본 내부의 인식이 바뀌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따지고 보면 65년의 국교정상화는 서로 내부의 「역사 청산」에 실패한 양국이 손을 잡은 것이었다. 지금 그 세대가 역사 무대의 전면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점은 늦긴 했지만 밝은 양국 관계를 점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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