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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은행장 사건:下(문민정부 5년: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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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은행장 사건:下(문민정부 5년:57)

입력
1998.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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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청와대 계좌” 盧 비자금 첫 확인/安 행장 “1,000억예치 사례비로 경호실장에 2억 줘”/검찰수뇌부선 담당 咸 검사에 “절대 파헤치지 말라” 압력/YS 대선자금 등 권력심장부 엄청난 비밀도 그대로 묻혀『검사님 그건, 청와대에서 관리하는 특별계좌입니다』

93년 5월초 대검중수부 10층 함승희(咸承熙) 검사실. 함검사 앞에 불려 온 푸른 수의복 차림의 안영모(安永模) 전 동화은행장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청와대라고요. 그럼 이현우(李賢雨)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간 이 돈은 도대체 뭐요. 경호실장도 행장 연임하는데 힘깨나 썼나요』(함검사)

『그게 아니라…. 이실장이 큰 건을 예치해 주었기 때문에 사례비로 준 것입니다』(안행장)

『큰 건이라…. 도대체 이실장이 얼마나 밀어 주었길래 사례비가 2장(2억원)이 넘나요』(함검사)

『한 1000억원 정도 됩니다』(안행장)

안행장을 추궁해 들어가던 함검사는 순간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던 구정권의 비밀.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괴자금.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검찰에 의해 최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원조(李源祚)씨 소환요구가 「물증이 없다」는 수뇌부의 비토로 무산된 뒤 함검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비자금 추적밖에 없었다. 안행장이 조성한 비자금은 대략 50억여원. 영업부와 비서실등에서 「이혜온」등의 차명으로 관리해 온 안행장의 비자금 꼬리가 함검사의 수표추적팀에 잡혔다. 수표발행 의뢰서에 「안동화」(동화은행 안대리),「한동출」(한일은행에서 동화은행이 출금)이라고 써놓아 누가 보아도 의미를 알 수 있게 한 영업부 직원들의 허술한 일처리는 함검사에게 원군역할을 했다.

함검사의 기억.『처음에는 이원조를 잡으려 했는데 중간에 엉뚱한 계좌가 튀어나왔어요. 6공비자금의 꼬리를 잡은 셈이었지요. 안행장의 비계좌에서 출발한 1,000만원짜리 수표 10장이 몇단계를 거쳐 다시 동화은행 효자동지점에 있는 「청송회」계좌에 꽂히더군요. 계좌안에 수백억원이 고여있었어요. 처음엔 친목계좌인줄 알았죠』

함검사는 청송회 계좌를 재차 추적해 들어갔다. 호숫가의 물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듯 수백억∼수억원이 중간계좌로 입출금을 반복하더니 몇개의 비계좌에 잠자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대략 1,000억원』이라는 안행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청송회 계좌에서 파생된 비계좌를 따라가 보니 여권중진 K씨등 정치인을 비롯, 한보그룹등 재벌의 비밀계좌와도 앞뒤로 맥이 닿아 있었다.

함검사는 비자금 관리 실무책임자가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인 이태진(李泰珍)씨라는 안행장의 말에 따라 비밀리에 이씨의 주민등록 등본과 사진까지 확보했다. 소환 준비를 마친 것.

이실장의 비자금을 확인한 며칠뒤인 5월중순. 함검사는 갑자기 상부의 호출을 받았다. 집히는 데가 있었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검찰 고위간부의 방이 있는 8층을 향했다.

(검찰 수뇌부)『함검사, 왜 이러는 거요. 저쪽에서 난리가 났어. 수사를 하면 한 사람만 잡아넣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더 잘 알지 않소. 절대 안됩니다』

함검사의 기억. 『나중에 들으니 노전대통령측에서 옛 검찰고위직을 지낸 인사를 통해 항의를 해왔더군요. 도대체 어디까지 가자는 거냐는 식이었죠. 결국 이현우씨도 소환할 수 없었어요. 꼭 잡아넣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수사에 큰 미련은 안가졌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처럼 전부 국고로 환수해 과거문제를 청산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검찰수뇌부는 사건을 아예 덮어버리더군요. 고작 2년뒤면 다 밝혀질 일을…』

이에 앞서 5월5일 서올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특실에 「VIP」가 갑작스레 입원했다. 병상의 환자 이름표는 이원조. 병명은 당뇨와 간경화였다. 검찰수사망이 옭죄어 오는 것을 느낀 이씨가 병실로 피신한 것이었다. 이무렵 정가에는 이씨가 병상에서 14대 대선자금의 비밀을 담은 문건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옥쇄(玉碎)」의 메시지를 YS측에 보낸 것이다.

6공 고위직을 지낸 이씨 측근의 회고. 『이씨는 「조용히 있는 나를 궁지에 몰아넣더니 이제는 아예 잡아넣으려 한다」며 화를 냈어요. 물론 건강이 좋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병실입원은 일종의 시위였습니다. 비자금 사건때 YS가 「대선자금을 직접 받은 적이 없다」며 「직접」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씨가 펄펄 뛰더군요』

YS와 이씨의 애증관계는 14대 대선직전 시작된다. 이어지는 6공 고위 인사의 생생한 증언.

『14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닥친 92년 11월15일까지 정보기관이 집계한 여론조사에서 YS는 DJ에게 1∼2%차이로 박빙의 리드를 지키고 있었어요. 이때만 해도 여권에서는 YS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어요. 언제 뒤집힐 지 모르는 형국이었으니 누가봐도 불안했죠. 더욱이 YS진영에서는 궁기(窮氣)마저 돌았어요. YS가 가신(家臣)들을 앞세워 선거자금을 걷다보니 도무지 성과가 없었던 거예요. YS본인도 여러 루트를 통해 이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씨는 시큰둥했어요. 다급했던 YS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SOS를 쳤어요. 이원조를 보내달라고 말이죠. 결국 노대통령은 11월말 이씨와 동서인 금진호(琴震鎬)씨를 청와대로 불러 YS를 지원할 것을 직접 지시했어요』

계속되는 이 인사의 회고.『사실 이씨는 YS대선자금 모금에 손을 담그는 것을 무척 꺼려했어요. 5,6공을 거치면서 워낙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에 정말 조심했지요. 솔직히 겁도나고…. 얌전히 의원 선수(選數)나 더 쌓고 여생을 편히 지낼 생각이었어요. 87년 대선때는 하지말라고 해도 친구를 위해 나설판이었지만 92년 대선때는 하기싫은 일을 죽마고우 부탁때문에 마지못해 나선 거죠. 그런데 문민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칼을 들이대니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생각밖에 더 들었겠어요』

YS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영수(金榮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회고. 『이원조씨 건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아, 그래요」하곤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안됐구먼」이라는 정도의 말은 있을 법 했는데 영 아니었어요. 아마도 YS는 이씨가 검찰에 가도 대선자금내역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어차피 사면에 매달려야 할 처진데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있는 듯 했어요. 이씨의 실체를 아는 검찰 수뇌부들이 괴롭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과연 YS와 집권세력이 이씨를 모른척 했을까. 당시 이씨가 입원한 병실에 김기섭(金己燮) 안기부기조실장과 민주계 중진 K씨가 잇따라 문병을 왔다. 문병보다는 이씨를 회유하기 위한 YS진영의 밀사였다. 며칠후 이씨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 일본으로 출국하고 전국구의원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씨의 출국으로 함검사는 의욕을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낸다. 이무렵 검찰은 슬롯머신 사건과 연루돼 사상처음으로 고검장급 고위간부가 구속되는 등 홍역을 앓고 있었다. 함검사는 수뇌부를 찾아가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JP를 칩시다. 고검장까지 구속됐는데 우리도 저쪽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경유착의 뿌리를 뽑고 검찰이 신뢰를 회복, 살아날 수 있습니다』

비자금의 바다속을 헤매던 함검사의 촉수는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종필(金鍾泌·현 국무총리)씨 계좌까지 닿아있었다. 김대표의 100억원대 비자금 계좌를 찾아낸 것이었다.

함검사의 회고.『당시 정치권은 검찰을 일방적으로 매도했어요.「그것봐라,너희들이 사정을 하겠다고」하는 식이었죠. JP의 계좌는 5월에 이미 모두 확보했어요. 중수부장을 통해 보고했지만 이번에도 수뇌부의 대답은 「기다려라」였어요.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JP가 YS와 갈등을 빚고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직후인 95년 4월. 검찰 고위간부 K씨가 막 개업한 함변호사를 찾아왔다.

검찰간부=함변호사. 그때 추적했던 계좌를 좀 넘겨줄 수 없겠나. 이번에 처리하려 하는데…

함변호사=처벌하려면 수사당시 했어야지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다고 뒤늦게 칼을 댄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드릴 수 없습니다.

문민정부 초기 최초의 사정수사이자 최대의 의혹사건이었던 동화은행장 비자금사건은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묻혀졌다. 그러나 YS 대선자금과 6공비자금, 여권지도자의 정치자금등 함검사가 발견했던「권력 심장부의 비밀」중에서 6공비자금은 2년여 뒤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이태희 기자>

◎사건의 조연 3인 3색/이용만 불구속기소 ‘특혜’/김종인 당시 유일하게 구속/이현우 2년후 ‘盧 비자금’ 구속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아수라장이 됐던 95년 7월1일. 김포공항에 이용만(李龍萬) 전 재무장관이 부인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93년 안영모 전 행장에게 7억3,000만원 가량을 받은 혐의로 기소중지된 후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한지 2년3개월여만의 귀국이었다. 이씨는 사건이 터지기 직전인 93년 3월 일본 게이오(慶應)대에 방문연구원자격으로 연수를 떠나 화(禍)를 피했다. 이씨는 귀국 즉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고 한달여 뒤인 8월말 대검중수부는 1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이씨를 불구속기소했다. 2년여 사이에 돈 받은 액수가 1/4로 줄었고 같은 사안으로 김종인(金鍾仁)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구속된데 비해볼 때 엄청난「특혜」가 분명했다. 이씨가 92년 대선자금 모금에 큰 공(功)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때문이었다.

당시 이씨 공판에 관여했던 관계자의 회고. 『수뢰액수가 줄어든 경위는 사실 나도 의아했어요. 1억4,000만원은 안전행장이 다시 조사를 받을 때 진술한 금액입니다. 기록상으로는 안전행장이 「함검사가 조사할 때는 이씨가 외국에 나가 있어 뒤집어 씌울 요량으로 허위 진술했다」고 돼있더군요. 물론 이씨는 「7억원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부인했지요』

한 검찰간부의 기억. 『중수부도 이씨를 「죽이려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청와대에서 「좀 챙기라」는 싸인이 내려왔겠죠. 중수부가 허튼 짓을 할 조직도 아니고…』

이씨 측근인사의 기억. 『이씨의 대선공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과장된 것이지요. 제가 알기론 은행장들을 통해 조금 도움을 주었을 정도였어요. 이씨는 「노전대통령이 나에게는 한마디도 없었다」고 했어요. 깊은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나설수도 없었을 거에요. 언젠가 이씨가 「나는 이름처럼 이용만 당했다」고 불만을 터뜨리더군요』 현재 자민련에 당적을 둔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씨는 『그 사건은 생각하기 조차 싫다』며 『훗날 지역구민들에게는 사실대로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동화은행장 사건으로 구속된 공직자는 김종인(당시 민자당의원)씨가 유일했다. 사건이 축소시비에 휘말리면서 깨끗한 이미지의 김씨가 구속되자 「희생양」이라는 동정론까지 일었을 정도였다. 당시 수사관계자가 전한 사연. 검찰에 불려온 김씨는 물증을 제시하자 아무말 없이 한참 있더니 『조부인 가인(佳人) 김병로(金炳魯) 대법원장의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 가슴 아프다』며 순순히 돈을 받은 것을 인정했다. 95년 비자금사건 수사과정에서는 김씨가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극동그룹의 녹지해제, 삼성의 상용차사업승인등의 현안을 특혜시비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대통령에게 재벌의 로비행태를 비판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 함검사의 화살을 피한 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사건으로 2년여만인 95년 11월17일 구속된다. 이씨의 영장범죄사실에는 함검사가 밝혀낸 이씨의 개인비리가 그대로 기록돼 있다. 「91년 청와대 경호실장 집무실에서 당시 동화은행장 안영모로부터 피의자가 관리중인 노대통령의 자금중 1,000억원을 동화은행에 예치해 준데 대한 사례로 7차례 2억1,000만원을 받은 혐의가 있음」

동화은행장 사건이 축소수사였음을 「자백(自白)」하는 부끄러운 검찰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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