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 행장,버틴다고 됩니까”에 ‘大魚’ 불어/이원조씨 계좌추적 등 압박에 청와대 출국유도/검찰도 개인비리 축소 벼락치기로 수사 종결/당시 함승희 검사 “거물 수두룩… 나라 거덜날것 같았다”『안행장, 버틴다고 되는 일입니까. 신문 안봤어요. 다른 은행장들도 다 들어와 있어요. 이미 다 불었단 말입니다』
93년 4월21일 오후. 서소문 대검청사 특별조사실에서 중수부 함승희(咸承熙) 검사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은행장도 데려왔다는 함검사의 「둘러치기」 수법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던 동화은행 안영모(安永模) 행장앞에 백지 몇장이 던져졌다.
『재산축적 과정은 문제삼지 않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니까. 솔직히 이야기하면 집에 갈수 있어요. 행장 연임운동할 때 힘써준 사람, 은행일로 돈 준 사람 중「잔챙이」는 필요없고「월척」만 적으시오』
채찍과 당근. 함검사의 「불구속」 언질에 힘을 얻은 듯 안행장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은행장 연임을 위해 최소한 청와대 경제수석, 재무장관, 금융계 황제라던 이원조(李源祚·당시 민자당 전국구의원)씨, 세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었을 것 아니요. 이 3명 중 하나라도 빼면 나에게 거짓말 하는 걸로 알겠소』
함검사의 호통에 안행장은 결심한 듯 펜을 들었다「이원조 추석때 떡값과 인사조로 2억9,000만원, 김종인(金鍾仁) 경제수석 2억1,000만원…」
『됐다』 함검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중수부장실로 달려갔다. 함검사(현 변호사개업)의 회고.『일단 3명을 기정사실화하고나니 안씨도 수긍을 하더군요. 그러더니 15∼16명의 명단을 주르르 쓰는 것이었어요.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엄청난 대어를 낚은 거죠』 동화은행장 사건. 문민사정의 신호탄은 이렇게 쏘아 올려졌다. 재산공개이후 검찰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정성진(鄭城鎭) 중수부장 등 고위간부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날아가고 사정사령탑인 중수부장에 김태정(金泰政·현 검찰총장) 검사장이 새로 임명됐지만 검찰은 사정 명부(名簿)에 「적(籍)」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중수부장이 미연방검찰청에서 자금추적기법을 공부한 특수수사통 함검사를 대검 공안부에서 중수부로 차출한 것도 이무렵이었다.
자칭타칭 「중수5과장」으로 불렸던 함검사였지만 당장 풀 보따리가 있을리 없었다. 3월 말의 어느날 함검사는 공안연구관으로 있을 때 모아 두었던 1년치 주간정보보고철을 뒤적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동화은행에서 말단여직원까지 동원해 백화점에서 영수증을 수거해 물의를 빚고 있다고 함. 행장연임과 관련있는 듯 함」
함검사의 기억.『직감적으로 「비자금」이 떠오르더군요. 중수부장에게 올라가 「안행장을 잡아오면 몇사람은 걸린다. 최소한 이원조다」라고 보고했더니 곧 오케이 사인이 오더군요』 D데이인 21일 오전 7시. 중수부 수사관들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안행장 자택에서 막 출근하려는 안씨를 가로막고 검찰청사로 데려왔다.
수사초반에 안행장의 입이 열렸지만 수사의 물줄기는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함검사의 이어지는 증언.『안씨가 들어와 다 불어버리니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수뇌부에서는 「일개 연구관이 그렇게 큰 일을 혼자 할 수 있는 것이냐. 도대체 중수부 과장들은 뭐하고 있느냐」며 주임검사를 중수2과장으로 바꾸더군요. 한마디로 정치인 수뢰사실을 없던 것으로 하라는 것이었어요. 중수부 과장 4명이 모두 투입됐고 2과장이 안행장의 횡령혐의를 조사하고 3,4과장은 동화은행에서 대출받은 업자들을 불러 안씨에게 준 대출커미션을 집중적으로 캤죠』
안행장은 연행 이틀만인 23일 23억5,000만원의 비자금 조성과 1억5,000만원의 대출커미션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영장은 함검사가 아닌 중수2과장이 서명했다. 안행장의 개인비리 사건으로 축소된 벼락치기 수사였다.
함검사는 수뇌부에게 이원조씨의 소환을 건의했지만 대답은 「NO」였다. 수뇌부는『현역의원을 어떻게 일방적인 진술만으로 소환하나. 물증이 없으면 곤란하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함검사는 정식수사팀에서 배제됐다. 일선 지검과 중수부에서 동고동락한 인연으로 함검사가 차출했던 수사팀도 해체됐다. 손발이 다 없어진 셈이었다. 청와대에도 긴급 보고됐지만 돌아온 건 「선(先)물증」 논리의 메아리였다. 김영수(金榮秀) 당시 민정수석의 회고.『수사의 기본이 안 돼 있었죠. 확실치 않은 단서로 현역의원을 죄인시할 수는 없었어요. 당시 검찰수뇌부에서도 물증이 없다고 보고해왔고 안행장도 진술을 여러번 번복했어요』
함검사가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의 미온적 조치에 반발하자 김수석은 함검사를 달래기위해 직접 청와대로 불렀다. 함검사의 회고.『김수석에게 이의원을 수사해야 성역없는 사정이 된다고 했지만 고생하는 것은 아는데 물증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김수석의 얘기는 다르다.『민정수석이 평검사를 만나 이야기할 리가 있었겠느냐』며 함검사를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함검사는 개혁세력으로 알려진 청와대 모비서관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고「밀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검 차장이었던 김도언(金道彦) 한나라당 의원은 수뇌부가 수사를 막았다는 함검사의 주장에 대해『사실과 다르다』면서도 『더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고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검찰수뇌부와 청와대가 이원조의원을 시종일관 보호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했던 모비서관의 증언.『사실 이원조씨는 YS입장에서는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 중 한명으로 솔직히 「봐주어야 할」 사람이었어요. 대선자금의 비밀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함검사는 이후 한달동안 국세청과 은행감독원 직원 4명과 함께 동화은행 강당에서 살다시피하며 안행장의 계좌를 추적,「물증」 찾기에 들어갔다. 함검사의 말.『상부에는 비밀로 했어요. 김중수부장은 알면서도 모른척 해주었지요. 5월초께 이씨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을 완벽하게 확보했어요』
당시 검찰이 추적한 이의원의 계좌에는 수백억원이 입금돼 있었고 이 돈은 14대 대선 직전인 92년 11월과 12월 집중적으로 인출돼 있었다. 「대선자금」의 꼬리를 잡은 것이다.
계좌추적 보고서를 손에 쥔 함검사는 임시국회 폐회일이 다가오자 이원조 의원의 소환조사를 재차 요구하며 마지막 담판에 들어갔다.그러나 수뇌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시끄러울 걸…』
검찰의 손길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 이의원은 임시국회 폐회 이틀전인 5월18일 극비리에 일본으로 출국한다. 회기중인데도 관용여권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여권을 이용했고 출국카드에 신분을「연구소 연구위원」, 출국목적도 「신병치료차」로 기록했다. 이씨의 측근 A씨의 설명.『이의원의 출국은 청와대의 작품이었어요. 청와대와 검찰의 묵인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물론 YS가 직접 나섰다기 보다는 비선라인에서 뛴 거죠』
함검사의 회고.『당시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덮어버리자는 소리를 하지 못했어요. 속으로만 꿍꿍 앓고 있었던 거죠. 이의원의 출국사실은 평소 알고지내던 정치부기자가 알려줬어요. 나는 사실 이의원이 출국하길 바랬죠. 5공비리사건 때도 일본으로 도피했던 이의원이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 압송되듯 귀국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죠. 정치적 딜레마에 빠진 이번 사건도 같은 길을 밟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흐르니 내가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검찰은「뒷문」을 통해 출국한 이의원에 대한 수사를 93년 11월1일 5개월만에 공식적으로 내사종결했다. 하지만 이씨는「함검사의 칼」을 의식한 듯 좀처럼 귀국하지 않았다. 이의원이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94년 10월15일. 함검사가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난지 꼭 10일만이었다.
최근 사무실에서 만난 함변호사의 말.『계좌추적과정에서 문민정부 5년내내 장관급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경제총수는 물론 중진정치인들의 이름이 수두룩하게 나왔어요. 이들을 모두 수사했다가는 나라가 거덜날 것 같았지요… 세월이 흐른뒤 「그때 그사람들」을 안잡아 넣은 게 정말 후회되더군요』<이태희 기자>이태희>
◎풀리지 않은 이원조 의혹/수백억대 계좌 추궁에 “大選자금 운운 전혀 모르는 일”/安 행장도 열듯하다 입다물어/“물증 추적 다안된것 같다” 당시 계좌추적팀 아리송 답변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수사가 한창이던 95년 11월25일. 이원조씨가 서초동 대검청사에 모습을 나타냈다. 6척거구의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도 검찰청사로 소환됐다.
은행감독원장 출신으로 5∼6공 당시 금융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원조씨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비자금 수사 자체가 의심을 받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록상 이원조씨 부분은 깨끗이 「세탁」되어 있었다. 검찰 관계자의 기억. 『함승희 변호사가 계좌추적을 통해 물증을 확보한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막상 뒤져보니 아무 것도 없어 황당했어요. 함변호사 주장처럼 검찰을 떠나면서 계좌추적 파일을 본인이 가져간 것인지 안씨는 물론 이미 처리한 사람들의 계좌추적 기록도 없더군요』
이씨는 함변호사의 후배격인 중수부검사에게 수사를 받았다.
검사=금융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씨=시중은행장이 검사장이라면 은행감독원장은 검찰총장입니다. 시중은행장은 은행감독원장을 무서워 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권한을 남용한 적은 없습니다.
검사들을 향한 「조소」섞인 발언이었다. 이씨는 안행장이 당시 민자당 선거대책위원장이던 정원식(鄭元植)씨에게 로비했었다고 진술하며 검찰의 예봉을 피해나갔다. 함변호사는 『수사당시 정씨뿐 아니라 다른 이북출신 고위인사들도 의심은 갔지만 안행장은 이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말했다.
검사=안행장이 피의자를 최우선 로비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아닙니까.
이씨=그건 오햅니다. 안씨가 연임청탁을 한 사람은 정원식씨입니다. 동화은행은 이북 5도민이 주주가 돼 설립한 은행이고 두사람은 황해도의 학교동기입니다. 로비대상은 제가 아니었어요.
검사=안행장에게서 은행업무나 연임청탁을 받으며 3억원 가까운 돈을 받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요.
이씨=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검사=당시 피의자가 관리하던 수백억원대의 계좌가 발견됐는데 대선자금이 입출금된 것은 아닌가요.
이씨=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궁금하고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안행장도 입을 다물긴 마찬가지. 그는『이용만씨 사건으로 조사를 받을 때 이원조씨에게 돈을 준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 했다』며 『다시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는 묘한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당시 수사검사의 증언.『안행장의 자제들과 친분이 있어 설득을 했지만 이씨에 대해 냄새만 폴폴 피우더니 끝내 입을 다물더군요. 안행장에게 93년엔 왜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냐고 물었더니 「검사가 하도 닥달을 해 할 수 없이 추석떡값 얼마 하는 식으로 말했다」고 합디다. 하도 답답해 당시 계좌추적팀에 참여했던 사람에게 「이원조 물증이 나왔느냐」고 물어봤죠. 하지만 추적이 다 안된 것 같더라는 대답뿐이었어요.정말 알듯 모를듯한 사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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