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진리’ 시정신 강조/팔순 나이까지 강의 열정/정공채·정현종·강은교 등 제자들 한국시 큰 흐름 형성16일 타계한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 시인은 신앙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자신만의 시세계로 한국시사를 개척한 것은 물론, 수많은 제자들을 우리 시단에 배출해 넓고도 깊은 시의 숲을 이루게 한 「거목」이었다.
81년 정년퇴임 전까지 26년간 교수로 재직했던 연세대의 제자들, 50년대 중반 이후 월간 「현대문학」추천위원으로 발굴한 시인들은 그 양대 줄기다. 혜산은 여든이 된 96년까지 이화여대 단국대 추계예술대에서 강의하는 정열을 보이며 문학도들을 감화시켰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이룩한 형이상학적 시풍에 영향받은 시인들은 현재 한국시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 대표적 시인들로는 유경환 정공채 박희연씨등 혜산이 57년 최초로 배출한 연세대출신 3명을 필두로 마종기 정현종 이경남 김대규 신대철 조남철 신승철 이영섭 강은교 강창민 마광수 이원조씨등을 꼽을 수 있다. 작고한 박용래 한성기씨도 그 시의 본향은 혜산에 있었다.
17일 빈소를 지킨 유경환시인은 『선생은 「시론」을 강의하면서 늘 시정신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시의 핵심은 진리 자유를 떠날 수 없다는 말씀이었다』며 『교정 돌담건물의 담쟁이넝쿨 아래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왜 식민지하에서 「해」와 같은 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민족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시인 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돌이켰다. 정공채시인도 『자상함을 잃지 않았던 선생은 늘 「시인다운 길을 가라」고 강조했다』며 『제자들은 그래서 대부분 문단정치와는 거리가 먼, 시류를 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시인이 많다』고 말했다. 정현종시인은 『선생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술 담배를 하지 않았지만 집으로 찾아가면 소주 한 병을 내주시는 바람에 혼자 마시며 말씀을 듣거나 눈빛만으로 침묵의 대화를 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제자들은 고인이 올곧음으로 현실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그래서 불이익도 많이 받았지만 결코 흔치 않은 시인의 귀감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마지막 청록파시인의 푸른 자태는 한국시단에 뚜렷한 맥을 이루어놓았다.<하종오 기자>하종오>
◎兮山 朴斗鎭 詩伯 영전에/명리 초연했던 삶에 고개 숙여
46년에 사화집 「청록집(靑鹿集)」이 나왔을 때 심취된 젊은 시인지망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시단은 「청록집」을 공동으로 펴낸 박목월(朴木月) 조지훈(趙芝薰) 박두진을 「청록파」 삼가시인(三家詩人)이라고 호칭하면서 하나의 「에콜」로 취급했습니다. 저도 그런 시단 분위기에 동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청록집」은 김소월 이래의 이 땅 서정시의 전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패러다임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정설처럼 되어갔습니다. 저는 또 이런 견해에 동조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고 시에 대한 안목이 좀 더 트이자 저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소월의 전통을 이은 이는 목월 뿐이고 지훈과 혜산 두 분은 다른 갈래의 시인이란 것이 뚜렷해졌습니다. 「청록파」 삼가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은 공통적이고 소월을 잇고 있지만, 소재의 처리에 있어서는 목월이 민요조로 처리한 것 외는 나머지 두 분은 전연 다른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시에서는 소재보다는 소재의 처리가 시인의 지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훈은 소재인 자연을 선적으로, 혜산 시백께서는 관념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 관념은 기독교사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메시아사상의 발현입니다. 대표작인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로 시작되는 시 「해」가 그 전형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류의 관념세계는 아직 이 땅에서는 하나의 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혜산 시백의 독보적 경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혜산 시백께서는 하여간에 이 땅 현대시사(詩史)에서 한 장을 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못합니다. 50년대의 젊은 모더니스트(요컨대 「후반기」 동인회와 같은)들의 주목대상이 「청록파」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가 혜산 시백을 숭앙해마지 않는 점은 그 깨끗한 처신입니다. 명리에는 언제나 초연한 자세로 존존하셨고, 원칙이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뒤죽박죽의 세기말 풍조 속에서 오직 원칙으로만 80여 평생을 살다 가신 혜산 시백께 고개 숙입니다. 이승의 일은 이승에 맡기시고 이제 편히 잠드소서. 붓을 놓으면서 언뜻 뉘우침이 옵니다. 이 글은 내 격에는 맞지 않은 글이 아닌가 하는.<김춘수 시인·예술원 회원>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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