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은 언더그라운드문화를 낳았다. 박정희(朴正熙)정권이 독재의 강도를 높여가던 60년대 말, 언더그라운드문화는 태동했다. 68년 가수 한대수가 발표한 노래 「물 좀 주소」는 50년대 양키문화로 시작된 우리 대중문화의 질감을 바꾸어놓은 사건이었다. 이때까지 노래는 그저 노래였다. 이 개념에 세대차이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그러나 한대수의 「물 좀 주소」를 기점으로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등 1세대 통기타 가수를 상징으로 한 청년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대변되는 70년대 청년문화는 「저항」의 그것이었다기 보다는 「외면」의 문화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한국의 언더그라운드문화는 가요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콘서트현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언제든 대중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로우 테크놀로지」의 예술장르인 가요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전파력을 가질 수 있었다. 80년대 운동권 노래집단, 90년대 클럽밴드 등 가요계를 주축으로 한 언더그라운드문화는 끊임없이 증식하면서 기존 상업문화의 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버그라운드문화에 대응한 언더그라운드문화는 오히려 오버그라운드문화를 더욱 기름지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노래패 「노찾사」의 「사계」가 프로그램 시그널로 쓰이고 유신시대 금지곡이었던 양희은의 「상록수」가 국가홍보 CF 주제가로 쓰이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90년대 중반부터는 다양한 장르의 언더그라운드문화가 나타나고 있다. 80년대까지 언더그라운드문화는 「저항」을 최대가치로 내세웠지만 90년대 말에는 「다양성」을 앞세우고 있다. 장산곶매, 서울영상집단 등 독립영화 제작사들의 작품들은 관계당국의 금지를 뚫고 상영해야 했지만 「내일로 흐르는 강」(박재호 감독)이 저예산 독립영화로 개봉관인 코아아트홀에서 상영된 것은 언더그라운드문화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반증이다. 「월간 지하만화 바나나」같은 언더그라운드만화도 그 증거이다. 70년대 말 양수리에서 행해진 무세중씨 등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 걸개그림으로 시작된 민중미술과 최근의 저예산설치미술에 이르기까지 언더그라운드문화는 점차 그 반경을 넓히고 있다.<박은주 기자>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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