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이승의 사람들이 보내는 의식은 같지 않다. 누구는 한 줄의 부음도 없이 쓸쓸히 떠나가고 누구는 한 나라가, 전 세계가 떠들썩한 가운데 사라진다.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도 다르다. 유족만의 조촐한 오열 속에 작별하는 사람이 있고, 긴 추모행렬 앞에 화려한 꽃상여를 타고 아듀를 고하는 사람도 있다. 다이애나 전 영국왕세자비와 마더 테레사의 죽음은 세기적, 세계적 장례식이었다.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에는 「등급」이 있다. 우리나라 신문에는 빠짐없이 부음난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장삼이사는 거기에도 실리기 어렵다.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인이 일정한 사회적 지위가 있든, 아니면 자식이라도 유명해야 한다.
부음난보다 예우받는 죽음은 정식 기사로 처리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생전의 업적이 요약되고 고인의 사진이 실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차이는 있다. 1단짜리 죽음이 있는가 하면 3단짜리도 있고 또 사회면에 나가느냐, 1면에 실리느냐도 다르다. 「사망」 「별세」 「타계」 「서거」 등 죽음의 표현에도 프로토콜(protocol:의전)이 존재한다.
가는 길은 똑같은데, 모든 죽음은 다 엄숙하고 신성한 것인데, 망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산 사람이 떠나보내는 의식은 이렇게 분명히 다르다.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6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부고는 거의 모든 일본 신문 1면 머릿기사였다. 일요일이라 호외를 발행한 신문까지 있었다. 그의 인생역정과 영화세계, 연보, 각계의 반응, 국민들의 추모 분위기, 세계 유명인사들의 애도 성명, 화보 등 신문마다 1면에서 사회면까지 5∼6개 면이 할애됐다. 역대 어느 총리도 가는 길에 이런 융숭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영화배우이자 가수 이브 몽탕이 91년 늦가을 자신이 부른 샹송 「고엽」처럼 떠났을 때 프랑스 언론이 표한 애도와 경의도 엄청났다. 모든 방송이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추모특집을 일주일 이상 방영했다.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오비추어리(obituary:부음기사). 그것은 고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더할 나위 없는 추모사다. 한 영화감독의 오비추어리로 도배를 하다시피한 일본 신문을 보면서 동료 기자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어서 이만한 예우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몇 명이나 있을까.
대답은 한결같이 『글쎄』 였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문화예술인, 학자, 종교인 등 중에 아마 몇 명은 1면 머릿기사로 죽음이 보도될 것이다. 하지만 뉴스적 가치 외에 전국민적인 진정한 추모와 극진한 헌사를 받는 사람은 아마 쉽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위인과 대가가 없는 것인가. 산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수㎞의 추모행렬을 이루는 장엄한 장례를 볼 수 없는 것일까.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부재한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인가.
대중적 인사의 부음을 호외를 찍어 보도하는 언론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을 가진 나라는 그런 인물을 키운 나라다. 그런 문화적 토양을 가꾼 나라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썩어서 영원히 부활하는 이름. 그 이름은 묘비명에 남는 이름이 아니라 사서(史書)에 남는 이름이다.
이 가을의 초입에서 우리 모두의, 그리고 우리 시대의 오비추어리를 생각한다. 당신이 죽으면 누가 부음을 써 줄 것인가? 누가 슬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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