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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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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건국 50년 다시뛰는 한국:6)

입력
1998.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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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신화 관치금융이 환란 잉태/개발논리·규제사슬에 산더미 不實속 “은행不死”/실명제도 5년만에 “폐기” 대규모 지하경제 여전/IMF로 퇴출·합병 혁명 진정한 시장금융 과제로한국금융의 반세기는 희생과 왜곡, 좌절의 수난사다. 고도성장과 산업화를 위해, 또 정치권력유지를 위해 금융은 이용당하고 때론 유린당해왔다. 잿더미위에 공장을 짓고 고속도로를 놓으려면 돈줄의 통제는 어느정도 불가피했다. 절대빈곤상태에서 정상적 자본축적과정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시장친화적이어야 할 금융은 개발논리에 짓눌리고 규제사슬에 얽매이면서 가장 반(反)시장적으로 되었고 결국 오늘의 위기를 맞게 됐다. 지난 50년간 성장의 신화를 이룩한 것도 금융이었지만 그 신화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것 역시 금융이었다.

■관치금융의 공과

페허경제에선 조달할 자금도 배분할 산업도 없었다. 광복부터 50년대까지 한국경제에서 금융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60년대이후 기본골격을 갖춘 금융은 그러나 철저한 관제(官製)였다. 고도산업화의 행군을 시작한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빈약한 자본을 전략산업(중화학공업)에 집중시키기 위해 금리 환율 통화량 인허가등 모든 돈줄을 통제했다. 돈의 가격(금리)과 배분이 수요공급 및 냉정한 심사기능 아닌 정부의 산업정책적 판단, 혹은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됐다.

이런 상황은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부실기업을 은행별로 강제할당한 86년 산업합리화 조치나, 권력자의 전화한통에 수천억원 돈을 부실기업에 밀어준 97년 한보사태는 그 단적인 예다. 관(官)주도금융은 산업화를 위해선 「빠르고 효율적인」 방편이었지만 대신 금융은 막대한 부실을 떠안고 혼자힘으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지진아」가 되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했다.

■금융기관의 양적 확충과 금융불사(不死)의 신화

50년대 국내은행은 조흥 상업 제일 한일등 4대 은행이 전부였다. 박정희정부는 성장재원조달을 위해 금융기관수를 늘렸고 외자조달을 위해 외국은행 국내지점이 속속 개설됐다.

80년대말은 은행 증권 보험등 금융기관 신설붐이 일던 시기다. 그러나 금융기관 신규인허가 과정에는 항상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다.

80년대초 정부소유은행이 민영화하고 금융기관의 수가 늘어났지만 개발시대와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예금자보호」의 미명하에 부실한 지방신용금고조차 간판을 내리지 못하는 「불사」신화가 여전히 지배했고 퇴출없는 금융은 결국 무책임과 방만경영, 도덕적 해이만 부추겼다.

■거대한 지하경제

만성적 산업재원부족과 과도한 규제사슬, 부패한 정치권력등은 음성적 금융거래와 대규모 지하경제를 형성시켰다. 72년 8·3조치는 사채시장을 제도권으로 흡수하려는 노력이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10년뒤 터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지하경제의 실체를 확인시켜줬다.

93년 금융실명제는 거래투명화를 향한 금융사상 최대이벤트였다. 그러나 음지를 선호하는 정치권­재벌의 협공속에 5년만에 용도폐기되고 말았다.

■좌절과 도약

90년대들어 금융은 금리자유화, 금융시장개방, 규제완화등 거센 자율화의 물결을 만났다. 그러나 낡은 의식과 허점투성이의 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채 겉옷만 갈아입은 금융자율화는 오히려 과당경쟁과 막대한 부실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그 결과는 IMF국난.

IMF이후 8개월간 한국금융은 지난 반세기 역사를 완전히 뒤짚어놓는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 은행 종금 증권등 부실금융기관의 역사상 첫 퇴출조치로 금융불사의 신화는 깨졌고 대량감원속에 「금융기관=평생직장」의 안이한 고정관념도 무너졌다.

상업·한일은행을 필두로 대형화를 향한 합병물결도 거세다. 한국금융은 지난 50년의 아픈 역사를 덮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이성철 기자>

◎수치로 본 금융/시중유통화폐 50년 2억, 98년 14조원/총예금 51년 2억,97년 198조원/상장사 63년 15개,98년 764개

경제규모의 급신장 만큼 지난 반세기 동안 금융도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우선 돈 자체가 많아졌다. 중앙은행이 발행, 시중에서 유통되는 화폐총액은 50년 단 2억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4조2,480억원(상반기말 기준)에 달해 무려 7만1,140배나 늘어났다. 경제규모가 커진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돈의 총량은 늘어났다.

소득이 신장되면서 저축도 많아졌다. 은행에 들어있는 총예금규모는 51년 2억원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100만배에 가까운 198조(지난해말)에 달하고 있다. 국민 1인당 예금액도 52년 20원에서 431만원으로 늘어났다.

저축의 증대는 대출을 통해 산업으로 수혈된다. 은행이 가계 기업등에 준 총대출금 역시 58년 264억원에서 200조4,000억원으로 커졌다.

어음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결제수단이다. 48년 3억원에 불과하던 교환어음총액은 지난해 7,391조원으로 늘어났고 어음 1장당 금액도 평균 200원에서 605만원으로 고액화했다.

기업에겐 자금조달수단, 개인에겐 투자수단으로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주식시장의 저변확대도 눈부시다. 63년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수는 고작 15개. 그러나 지금(8월27일 현재)은 764개 기업에 달한다. 상장주식수는 당시 3,197만주에서 현재 107억2,597만주로 늘어났고 상장기업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 시가총액도 100억2,472만원에서 65조4,706억452만원으로 6,500배이상 불어났다.

보험의 생활화는 경제발전과 소득증대, 국민의식변화의 중요한 단면이다.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시절 보험은 일종의 사치였고 56년 국민 한사람이 내는 보험료는 20원에 불과했다. 그나마 생명보험은 불모지에 가까웠고 기업이나 단체가 가입하는 손해보험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작년말 국민1인당 보험료는 142만원에 달했다. 보험료가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0.24%에서 15.69%로 비약적 신장을 이뤘다.<이성철 기자>

◎사고로 본 금융/52년 첫 정치자금 의혹 ‘중석불’ 사건/62년 주가조작 공화당 비자금 챙겨/82년 이철희·장영자 83년 명성사건/수많은 사건 불구 마무리 흐지부지

건국이후 우리는 수많은 경제적 사건을 겪었고 그 때마다 사건의 한 축에는 거의 예외없이 금융기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필요와 부패로 인해 사건의 뒷마무리는 항상 흐지부지됐고 금융기관의 내부종양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결과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이어졌고 결국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52년 최초의 정치자금 의혹사건이자 금융사건인 이른바 「중석불(弗)」 사건으로 우리 금융사건의 역사는 시작된다. 정부는 중석을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 즉 중석불 400만달러를 공정환율 6,000대1로 민간인들에게 불하했고 민간업자들은 이를 시중에 달러당 3만환씩에 팔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553억환의 폭리를 취했다. 이과정에서 막대한 리베이트가 정부로 흘러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다.

부정부패일소를 명분으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금융을 이용해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 62년 공화당창당자금을 만들기 위해 중앙정보부 주도로 주가를 조작한 이른바 증권파동이 일어나고 73일간이나 주식거래가 중단된다. 95년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건에 따르면 당시 공화당은 최소 40억∼50억환(3,000만달러)을 비자금으로 챙겼던 것으로 밝혀졌다.

70년대에는 은행원과 결탁, 신용장을 위조하고 가짜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해 71억원을 대출받아 가로챈 박영복(朴永復)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에는 외형상 큰 금융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금융이 제자리를 잡아서라기보다는 권력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고 통제됐던 탓에 부정과 불법이 표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후 80년대초반 대형 금융사건들이 터진다. 82년 이철희(李哲熙)­장영자(張瑛子) 부부가 권력의 후광을 업고 대기업들로부터 총 7,111억원의 어음을 받아 이 가운데 2,048억원을 부도낸 초대형 금융사건이 일어난다. 임재수(林在琇) 당시 행장등 조흥은행 관계자들은 이­장부부에게 무담보대출을 해주고 어음장을 유출하는 등 공범역할을 했다. 장영자씨는 12년만인 94년 또다시 상호신용금고와 사채전주들을 상대로 동일한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여 세인을 놀라게 한다.

이어 83년에는 명성그룹이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김동겸(金東謙) 당시 대리와 짜고 은행공신력을 이용, 1,138억원의 사채예금을 끌어다 1,066억원을 대출받아 쓴 「명성사건」이 터졌다. 김대리는 지점장의 묵인아래 아예 장부기입조차 하지않고 수기(手記) 통장을 통해 예금과 대출을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나 은행들의 불법 영업관행이 수술대에 오르기도 했다.

92년에는 상업은행 명동지점장 이희도(李希道)씨가 사채업자를 끼고 양도성 예금증서(CD)를 이중유통시켜오다 자금압박을 받자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CD의 유통실태와 문제점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언급한 사건 외에도 특히 80년대 이후 발생한 영동개발사건, 수서사건, 정보사 토지사기사건, 덕산 우성 한보 부도등은 금융기관의 묵인 방조 내지는 공모로 이뤄진 사실상의 금융사고들이었다.<김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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